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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12] 나당 외교 ③
가만있어도 백제군이 스스로 무너진다는 말씀입니까?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18 06:30:20
 
 
무열왕은 인문을 압독주(押督州·경산)의 군주로 임명하고 금성에서 당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장산에 성을 쌓게 했다. 그리고 셋째 왕자 문왕(文王)을 대신 장안으로 보냈다.
당나라에 도착한 문왕은 인문이 돌아올 수 없는 연유를 알렸다. 당 고종은 3년의 기한을 정하는 선에서 이를 윤허했다.
 
한편 유신은 비밀리에 손을 잡은 백제 대신 임자가 보내오는 첩보를 통해 사비성의 움직임을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더불어 백제의 주요 성에서 암약하고 있는 간자들을 동원해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가뜩이나 왕실과 귀족 간의 대립으로 어수선한 형국에 흉흉한 소문이 퍼지니 백성의 불안감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감옥에 갇혀 있던 성충이 숨을 거뒀다. 의자왕은 그를 옥에 가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풀어 주려 했지만 주변의 간신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이번 기회에 국왕을 우습게 여기는 귀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임자였다. 그는 신라와 비밀리에 연통하면서도 겉으로는 국왕의 근신을 자처했다.
성충은 옥중에서 목숨이 다해 가는 와중에도 충정을 담은 글을 국왕에게 올렸다.
 
충신은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했습니다. 신이 근래 천문을 살피니 이 나라에 곧 큰 전란이 닥칠 징조가 보였습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지형의 험함을 얻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 혹은 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로는 기벌포(伎伐浦·금강 하구)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만일 이들 지역을 선점해서 지킬 수 있다면 가히 사직을 보전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못 하면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의자왕은 성충이 올린 글을 읽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만일 적이 침입해 온다면 그가 지적한 두 곳이 기필코 사수해야 할 요충지였다. 다만, 당장 쳐들어올 만한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굳이 꼽으라면 당군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는 것인데 그동안 당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고구려였기에 도움을 받아야 할 백제를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었다. 백제군에게 시달리던 신라가 여러 차례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게 그 증거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충의 근심은 노파심에서 나온 것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성충이 죽자 귀족들은 의자왕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의자왕은 금화의 주청대로 왕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전국의 땅을 식읍으로 나눠 주었다. 지방까지 친정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귀족들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의자왕의 친위 세력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금군의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 고종은 장군 설인귀 등에게 군사를 주어 여러 차례 요동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강한 반격에 번번이 패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당에 대한 일말의 경계심마저 풀고 신라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신라의 요충지인 독산성(禿山城)과 동잠성(桐岑城) 등이 큰 타격을 입었다.
 
당군이 요동에서 고구려군에게 연전연패한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의 무열왕은 마음이 무거웠다. 대야성 함락 이후로 백제의 의자왕은 끝장을 보겠다는 기세로 덤벼들었다. 대장군 유신의 용병술에 기대어 힘겹게 막아 내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당나라의 도움마저 받을 수 없다면 신라는 망망대해에서 풍랑을 만난 조각배와 같은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무열왕은 신하들을 불러 국난을 타개할 방법을 의논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언제까지 당나라의 도움만을 기다릴 수는 없소. 그들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어서 우리를 도울 여력이 없을 것이오. 우리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워야 하겠소.”
이찬 문충(文忠)이 큰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가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지금으로서는 방어에 주력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어렵게나마 독산성과 동잠성을 지켜 냈으니 백제군의 기세도 한풀 꺾였을 겁니다.”
문충의 위로에도 무열왕이 걱정을 거두지 않자 유신이 나섰다.
그리 심려치 마소서. 백제의 국내 사정도 대군을 한없이 움직일 만큼 좋지는 않습니다. 의자왕이 41명의 왕자에게 좌평의 벼슬을 주어 지방 각지에 파견하는 바람에 병력이 분산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군신 간의 불화로 전쟁에 나설 장수마저 부족한 상황입니다. 비록 의자왕의 친위 부대가 강하다고는 하나 귀족들의 반발로 지원이 원활치 못해서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겁니다.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시간을 끌면 머지않아 스스로 물러갈 겁니다.”
대장군은 확신에 차 있었다.
 
중시(中侍) 문왕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가만있어도 백제군이 스스로 무너진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이를 촉발하고 가속할 수 있는 후속 조치가 필요하오. 아군의 힘으로도 충분하리라 보오. 내가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출병할 것이오.”
유신의 자신감은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됐다. 어느새 편전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인문이 간곡히 아뢰었다.
소신이 반드시 당나라 황제를 설득하겠습니다. 비록 당군이 국지전에서 몇 번 패했다고는 하나 이는 단지 전초전일 뿐입니다. 저는 황제가 약속을 지키리라 믿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신이 반대하고 나섰다.
굳이 외국에 의존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 군대만으로도 충분히 백제군을 제압할 수 있네.”
유신은 타국의 힘을 빌리려는 인문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이제껏 자신이 조련해 온 군대가 백제군보다 수적으로는 열세이지만 사기만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당군의 공격으로 고구려군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부 분열을 겪고 있는 백제와 맞붙는다면 신라군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인문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지 않습니다. 백제군은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내분으로 혼란에 빠져 있지만 외적이 출몰하면 일순간에 다시 뭉칠 겁니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서 싸운다면 우리 신라의 군대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만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당군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때 잠자코 의견을 듣고 있던 무열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짐이 이제껏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전력을 쏟은 이유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왜의 동맹으로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였소. 지금 상황이 그리 달라진 게 없는데 당과의 협력 없이 단독으로 인접한 나라들과 싸우는 것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소. 대장군도 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짐의 심정을 이해하길 바라오.”
일순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명분과 실리 중 어느 쪽을 택할지는 무열왕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그는 과감하게 실리를 선택했다.
무열왕은 인문을 당나라로 보내기로 했다. 그의 임무는 당군을 백제 땅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한시가 급했기에 왕자는 곧바로 행장을 꾸렸다. 이미 궁성 앞에는 불처럼 타오르는 갈기와 윤기 흐르는 밤색 털을 가진 천리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떼의 군마가 인문의 앞뒤를 호위한 채로 길을 나섰다. 흙먼지가 길을 따라 뽀얗게 피어올랐다.
 
서해의 낙조
 
괴이하고 수상한 소문이 백제의 사비성을 휩쓸었다. 여우 떼가 궁 안을 돌아다니다가 그중 한 마리가 상좌평의 자리에 앉았다느니,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느니 하는 궁궐에 얽힌 소문부터 도성 남쪽 사비하(泗沘河)에서 죽은 채 떠오른 3장 길이의 물고기와 생초진에서 발견된 18자의 여자 시신에 관한 소문까지 줄을 이었다.
해가 바뀌자 진위와 상관없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감으로써 그 파장을 더욱 키웠다.
그 소문에 의하면 도성의 우물은 물론 사비하까지 핏빛으로 변했고,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사비성 안에 있는 사찰인 천왕사(天王寺)·도양사(道讓寺)의 탑과 백석사(白石寺) 강당에 벼락이 떨어졌고, 용처럼 생긴 구름이 동서로 나뉘어 싸우기도 한다고 했다.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많은 사람에게 막연하지만 숨 막히는 위기의식을 심어 줬다.
나라에 망조가 든 게야.”
어찌 이런 상서롭지 못한 일들이 자꾸 일어날까?”
사비의 백성은 만나기만 하면 두려운 속내를 숙덕였다.
 
도성의 개들이 시끄럽게 짖던 밤이 지난 후 새로운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다.
들었어? 어제 궁궐 근처에 귀신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어제 개 짖는 소리에 잠을 설치기는 했네만.”
, 짐승이 귀신 오는 건 먼저 안다고 하잖아.”
그래, 귀신이 나타나서 어쨌다는 게야?”
그게, 백제가 곧 망한다고 말하고는 땅속으로 사라졌다는 거야.”
백성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함부로 말하다가 관원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경을 칠 판이었다.
해괴한 소문은 산들바람처럼 사람들 사이로 틈입했다. 조금의 여지만 있어도 파고들었다가 잡으려 하면 금세 빠져나가 버렸다. 그러더니 어느덧 사비성은 물론 백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러한 소문은 의자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대로한 왕은 즉시 좌평 임자에게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를 잡아내 엄벌에 처하라 명했다.
마음이 심란해진 국왕은 정무를 일찍 파하고 침소에 들었다. 침상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다감한 손길이 어깨 위에 살포시 닿았다.
어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십니까?”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니 국왕의 마음속에 있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금화로구나. 언제 왔느냐?”
무슨 일이시기에 사람이 들어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심려하십니까?”
의자왕은 한결같이 살가운 금화가 좋았다. 그는 외로운 통치자였다. 귀족 세력을 누르고 국왕으로서의 절대 권력을 얻었지만 덕분에 마음을 터놓고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이제 모든 일을 혼자 생각하고 스스로 결단해야 했다. 이런 상황은 그를 지치고 힘들게 했다.
궁 밖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이 예사롭지 않구나.”
의자왕은 소문이 유언비어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소첩도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폐하께서 심려하실 만한 일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나라가 새롭게 태어날 때는 늘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지요.”
금화는 용하기로 소문난 무녀(巫女)의 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령의 뜻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런 금화가 나쁜 징조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네 말을 들으니 한결 안심되는구나.”
의자왕은 금화를 끌어당겨 와락 품에 안았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일국의 왕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저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일개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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