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70] 패배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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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25 06:30:41

종로에서 영화 보고, 황금장에서 처음 사랑을 나눈 이후로 변태섭은 희숙을 자주 찾았다. 변태섭은 이모 집에서 나와 낙성대 근처에 자취방을 얻었다. 그는 희숙에게 일주일에 책 하나씩 던져 주고 읽어 오도록 했다. 의식화 개인 과외였다. 토요일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과외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희숙은 간단한 찬거리를 준비해 변태섭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희숙은 변태섭의 여자가 됐다고 믿었다. 몸과 정신이 그와 하나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하는 모든 것엔 이유와 의미가 있었다.

학교 운동권 동아리는 물론 기숙사 내 운동권 선배들이 하는 세미나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변태섭이 던져 준 책을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기숙사 선배들한테 물었다. 변태섭을 실망하게 놔둘 순 없었다. 아니,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변태섭을 만나는 날이면 희숙은 아침 일찍 학교 근처 공중목욕탕에 가서 몸을 정성껏 씻었다. 책을 읽고 목욕하고. 희숙에겐 제식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막상 만나면 그는 희숙이 요약 정리한 내용을 묻지도, 그녀의 생각을 묻지도 않았다.

“다 잘 읽었겠지, 희숙이 똑똑한 거 아는데.”

숙제 검사받기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가져온 책과 노트를 가지런히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변태섭은 책과 노트를 치우고 희숙을 방바닥에 눕혔다. 희숙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앞으로 나 만날 땐 브래지어 하지 마. 희숙은 변태섭이 젖가슴을 움켜쥐고 젖꼭지를 빨 때마다 갓난아이에 젖을 물린 어미 같은 심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젖꼭지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희숙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변태섭은 후배위를 좋아했다. 변태섭은 젖꼭지를 깨물다가 갑자기 희숙의 몸을 뒤로 돌려 상의는 그대로 둔 채 가슴만 드러나게 한 뒤 희숙의 두 손은 책상 모서리를 잡게 했다. 변태섭은 희숙의 상체를 더 숙이게 해, 그녀의 은밀한 곳이 천정을 향하도록 했다. 희숙이 가장 싫어하는 자세였다. 여자라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를 감상하게 놔두는 일은 수치스러웠다. 책상 위 손바닥 크기의 거울을 통해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였다. 그는 그가 상상하는 모든 판타지를 희숙에게 실현했다. 그의 야수 같은 희열과 구겨진 욕정까지 책상 모서리의 작은 거울에 담겼다. 변태섭은 정글을 탐험하다 길을 잃은 사람처럼 낯설고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희숙은 그런 자세를 요구받을 때마다 마치 여러 명에게 강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눈들이 희숙의 그곳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는 것 같은, 모멸감이었다. 거울 속 희숙은 무력에 짓밟혀 저항하기를 포기한, 인간의 존엄이라곤 한치도 남아 있지 않은 패배한 영혼이었다. 희숙은 제발 빨리 끝내길 바랐지만, 변태섭의 감상 속도는 더뎠다. 마치 코스 요리를 즐기는 것처럼.

벗겨진 건 몸만이 아니었다. 희숙은 영혼까지 발가벗겨진, 주권 없는 노예였다. 변태섭은 자기 여자의 고통을 즐기는 발정 난 수컷이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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