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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주의 펀드’가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목소리를 한층 드높이고 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행동주의 펀드들이 건드린 기업들이 주가 상승세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주 행동주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 주주환원 확대 등을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는 반면, 경영권 과도하게 침해해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갉아먹을 것이라는 불안감도 공존한다. 일각에서는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복수 의결권(차등의결권) 등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동주의 펀드 움직이자 투자대상 기업 주가 ↑
국내 증시에 ‘행동주의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글로벌 의결권 조사기관 인사이티아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 대상이 된 국내 기업은 지난해 47곳으로 전년(27곳)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미국(511곳), 일본(107곳), 호주(61곳), 캐나다(53곳)에 이어 세계 5위다. 행동주의가 활발한 미국·일본에 비해 대상 기업 수는 적지만 최근 증가세는 가장 가파르다.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의 지분을 사들여 의결권을 확보한 뒤 지배구조 개선 등을 요구해 수익을 창출하는 기관투자자를 뜻한다. 단기적 효과를 추구하는 단순 헤지펀드와는 다르게 기업의 장기적 성과에 초점을 맞춘다. 최근 국내 행동주의 펀드는 △이사진 교체(주주 추천 감사위원 선임) △주주환원 확대(배당, 자사주 매입·소각) 등으로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얼라인파트너스가 작년 초 에스엠을 상대로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한 게 시발점이었다. 당시 얼라인은 이수만 전 총괄프로듀서의 개인회사인 라이크기획과 프로듀싱 계약을 조기 종료하고 주주 추천 감사위원을 선임하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에스엠은 지난해 정기 주총에서 곽준호 KCF테크놀로지스 전 최고재무책임자(CFO)를 감사로 선임했고 작년 말 라이크기획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3일에는 이 전 총괄을 음반 제작에서 배제하는 ‘SM 3.0’ 전략을 발표했다.
다른 행동주의 펀드들도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 3월 정기 주총을 앞두고 주주친화적인 안건을 제시하고 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이번 주총에서 태광산업을 상대로 주주들이 추천하는 감사위원 선임 및 배당성향 20% 등을 요구할 예정이다. BYC에는 대주주 일가의 부당 내부거래 등을 지적하면서 한 법률전문가를 감사위원으로 선임하는 안건의 주주제안을 보냈다.
안다자산운용과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는 KT&G에 자회사 KGC인삼공사의 인적분할을 실시하고 사외이사 정원을 4명으로 확충하는 안건을 제안했다. 얼라인은 에스엠에 이어 JB금융지주를 상대로도 주주행동에 나섰다. 연초 요구한 중기 주주환원 정책 수립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당 900원 결산배당, 사외이사 추가 선임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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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게 보기=이미지 클릭 / [그래픽=박서현 기자] ⓒ스카이데일리 |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에스엠의 주가는 23일 기준 12만6300원으로 올 들어 64.7% 올랐다. 라이크기획과의 계약 종료를 공시하기 직전인 지난해 10월13일(6만3200원)과 비교해선 무려 2배 가까이 치솟았다. 얼라인의 지배구조 개선 요구가 ‘얼라인·에스엠경영진·카카오’ 대 ‘이수만·하이브’ 간의 경영권 분쟁을 불러온데 따른 영향으로 분석된다.
트러스톤이 감사위원 선임 등 주주행동을 벌인 BYC와 태광산업은 연초 이후 각각 23.8%, 6.7% 상승했다. 얼라인이 집중 공세를 가하고 있는 JB금융지주는 이 기간 17.3% 올랐다. 반면 KT&G는 올들어 1.3% 떨어졌다. 안다자산·FCP 등이 요구한 KCG인삼공사 분리상장, 사외이사 증원 등의 주주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주총 소집 절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펀드의 자체 수익률도 우수했다. 트러스톤의 공포펀드인 ‘ESG레벨업펀드’은 최근 2년간 18.0%(21일 기준) 올랐다. 국내 ESG펀드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 펀드는 ESG 점수가 낮더라도 G(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할 경우 주가 상승을 노릴 수 있는 기업을 선별해 투자한다. 일감 몰아주기, 경영권 편법승계 등으로 저평가된 기업이 주요 대상이다.
증권가는 행동주의 펀드의 행보가 투자대상 기업의 주가 상승과 한국증시 재평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최효정 KB증권 연구원은 “정기 주총을 앞두고 행동주의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대상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환원 확대 기대감으로 연결되고 있다”며 “실제로 이들 기업들의 주가는 WMI500 대비 14.3%p 상회했는데 이와 같은 실질적 변화가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을 활발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이어 “국민연금도 주식 위탁운용사를 대상으로 올해 주총에서 인수합병(M&A), 인적분할 등 기업가치에 큰 변화를 주는 이슈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당부하고 중점관리사안에 E·S의 핵심 요소인 기후변화, 산업재해 관련 중점관리 사안을 공식 포함하고 있다”며 “이에 더해 ESG 관련 주주활동도 강화되고 있어 행동주의 펀드 활성화에 적합한 환경이 마련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투자·고용 악화 우려에 경영권 방어수단 필요 의견도
다만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 늘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고, 우려할 점도 많다. 단기 이익을 위해 기업을 공격하거나 기업 경영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지배구조 개선을 내걸고 나타났지만 단기 주가를 높여 수익을 내는 약탈적인 모습도 적지 않다.
일례로 일본 산업용 로봇기업 화낙(Fanuc)은 행동주의 펀드에 휘둘리며 오랜 기간 성장 정체를 겪었다. 2015년 2월 미 헤지펀드 서드포인트(Third Point)는 화낙에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 정책을 요구했다.
화낙은 주주제안을 받아들였다. 그해 4월 5년간 이익의 최대 80%를 주주에게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투자재원을 주주환원에 쏟아 붓자 실적은 급감했다. 2014년 2080억 엔이던 순이익은 2015년 1600억 엔, 2016년 1280억 엔으로 줄었다.
주가도 기대만큼 오르지 못했다. 주주환원 정책 발표 이후 2만7000엔대로 치솟았다가 얼마 못 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8년이 지난 현재 주가는 2만2480엔(24일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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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게 보기=이미지 클릭 / [그래픽=박서현 기자] ⓒ스카이데일리 |
이 같은 우려는 통계로도 나타난다.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2013·2014년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가 행동주의로 공격하고 종료한 해외 기업 48곳을 조사한 결과,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 개입은 기업의 투자·고용·실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격대상 기업들의 설비투자 규모는 경영 개입 전 392억9000만 달러였지만 경영 개입을 시작한 해 383억5000만 달러로 1년 만에 2.4% 줄었다. 이듬해에는 이보다 23.8%, 그 다음 해에는 21.2% 깎였다. 연구개발(R&D) 투자액도 비슷했다. 개입 기간만 해도 52억2000만 달러였지만 1년 후 41억4000만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2년 후에도 37억4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고용도 위축됐다. 해당 기업들의 고용인원은 경영 개입 직전 107만7570명으로 전년(98만6897명) 대비 5.3% 늘었지만 개입 후에는 102만5979명으로 4.8% 줄었다. 이듬해에도 84만557명으로 18.1% 하락했다. 실적 역시 고꾸라졌다. 경영 개입 전 150억4000만 달러였던 순이익은 경영 개입 기간 80억9000만 달러, 1년 뒤에는 13억2000만 달러로 급감했다.
박우열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행동주의 펀드가 가장 많이 요구하는 사항 중 하나는 배당 확대다. 이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주가가 오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투자가 줄어 성장 잠재력이 저하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러한 여러 가지 비판을 피해가려면 성과 창출의 핵심으로 내걸고 있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 피투자 기업에 대한 가치 제고가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과거에는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지배구조가 복잡한 대기업이었지만 최근 경영권 방어가 취약한 중소·중견기업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경영권 방어에 과도한 자본을 쓰게 되면 성장 잠재력만 갉아먹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재계에서는 기업들이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 10월 2021년 자산 상위 100대 기업의 정관을 분석한 결과, 8곳만이 정관에 경영권 방어 조항을 채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방어 조항도 이사 해임 규정을 상법 특별결의 요건보다 조금 강화하거나 시차임기제를 도입하는 정도에 그쳤다.
해외 기업은 △차등의결권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 △황금주(Golden Share) 등의 경영권 방어수단을 활용하고 있다.
미국·일본·프랑스는 3개 모두, 영국·이탈리아는 차등의결권·황금주, 독일은 포이즌필·황금주, 캐나다는 차등의결권을 허용했다. 포이즌필이란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황금주는 단 1주만으로 주총 안건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식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한진칼이나 교보생명 사례처럼 지배구조에 일시적 균열이 발생했을 때 사모펀드들이 이를 틈타 기업 지배권을 위협하고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며 “정관 분석을 통해 우리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수단 부족이 확인된 만큼 글로벌 스탠더드에 준하는 방어수단의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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