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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35] 구진천 ②
평양성이 함락됐지만 고구려인들은 곳곳에서 저항하고 있습니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24 06:30:20
 
 
서찰을 받아 읽은 의상의 안색이 변했다.
누가 이 서찰을 전했느냐?”
보아하니 관아의 통인 같았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치 마라.”
의상은 행자의 입을 단속하고 이층 방으로 올라가서 서찰을 다시 펼쳤다. 이는 구진천이 보낸 것이었다. 그 속에는 당나라 최신 병장기의 성능과 생산 규모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앞서 흠순이 일러 준 말에 이어 구진천이 보낸 정보까지 접하고 나니 의상은 마음이 급해졌다.
 
의상은 행자를 소리쳐 불렀다. 평소 고요하기만 하던 대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란 행자가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당장 떠날 채비를 해라!”
장안에서 며칠 머물겠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행자는 의아하여 되물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의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 한시라도 빨리 신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되뇌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 양도가 옥중에서 사망했다.
고종은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해 마지못해 흠순을 풀어 주었다.
 
서력 670년 정월, 귀국한 의상에게서 구진천의 전언을 접한 문무왕은 군사를 움직일 때가 왔다고 느꼈다. 앉아서 당하지 않으려면 선수를 쳐야 했다. 그러려면 당의 군대가 토번과의 전쟁으로 서역에 묶여 있는 지금이 적기였다.
문무왕은 도열한 대신들을 바라보면서 뜻을 밝혔다.
숙적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고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소. 그런데 당나라가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 몫까지 차지하더니 이제는 신라 땅까지 노리고 있소. 이는 그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고 있기 때문이오. 짐은 지금이야말로 군신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무도한 저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 줄 때라고 생각하오.”
 
태대각간 김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국왕 앞에서도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저들이 야욕을 드러내리라는 것은 예견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대비를 해 왔습니다.”
이미 칠순을 넘긴 나이였지만 전군을 호령하던 기개는 여전히 돋보였다.
당의 전력이 막강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둑도 작은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법입니다. 당에 저항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그들의 힘을 약화시킨 후에 대적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어떤 방책이 있겠소?”
문무왕은 태대각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신은 신하이기 전에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다. 태자 시절부터 여러 전장을 오가며 그를 지켜봤기에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평양성이 함락되었지만 고구려인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저항하고 있습니다. 토번과의 싸움에서 고전하고 있는 당군은 조만간 고구려 땅에 주둔하고 있는 설인귀의 군대를 서쪽으로 이동시킬 겁니다. 그때를 노려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을 쳐서 몰아내면 됩니다.”
유신의 진언은 타당성이 있었다. 신라의 전력이라면 백제 땅에 주둔한 웅진도독부의 군사를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문무왕은 태대각간의 의견을 받아들여 고구려 부흥군 세력과의 연계를 도모했다. 고구려 부흥군은 자신들을 공격했던 신라의 제안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당장 상대해야 할 적은 당군이었기에 무턱대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악마의 도움이라도 뿌리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유로 가장 먼저 신라와 손을 잡은 자가 고연무(高延武)였다. 그는 위두대형이었던 인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당군에게 끌려간 이후 유민을 규합하여 당나라에 맞서고 있었다.
문무왕은 사찬 설오유(薛烏儒)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연무를 돕게 했다. 신라의 지원에 힘을 얻은 고연무는 군사를 이끌고 압록수를 건너 북상했다. 그들의 목표는 오골성(烏骨城)이었다.
나려(羅麗) 연합군이 오골성 근처 개돈양(皆敦壤)에 이르렀을 때 당과 손을 잡은 말갈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연무는 말갈 군사들이 대비할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신라군의 합류로 사기가 오른 고구려 군사들의 창칼이 사방을 누비고 다녔다. 말갈군은 피로써 고구려를 배신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나려 연합군이 개돈양에서 말갈 군대를 격파하자 당나라는 급히 군대를 파견했다.
당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지자 설오유는 고연무의 막사를 찾았다.
당의 정예군과 격돌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일단 군사를 물린 후에 시간을 두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유신의 지시를 받은 설오유는 애초부터 당군과 정면으로 충돌할 생각이 없었다.
당군의 위세가 두려웠다면 아예 군사를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오. 이제 겨우 첫발을 뗐을 뿐인데 군사를 물리자는 게 말이 되오!”
고연무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신라군이 자신들을 도울 마음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당나라 군대가 이미 요동성을 떠났다 하니 조만간 이곳으로 모여들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골성을 함락시킨다 해도 곧 저들에게 포위되고 맙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곳에서 명예롭게 죽는 게 아니라 당군의 칼날 아래 웅크리고 있는 고구려 백성을 일깨우는 겁니다.”
 
설오유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이곳에 모인 군사만으로는 당의 대군과 싸워 이길 수 없었다. 무턱대고 싸우다 죽는다면 이름을 빛내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이제 막 일어나고 있는 고구려 부흥 운동에는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고연무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설오유가 다독였다.
장군은 고구려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일단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어디로 간단 말이오?”
설오유의 말에 수긍하고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일단 백성(白城)으로 후퇴하여 당군의 움직임을 살피는 게 좋겠습니다.”
이리하여 나려 연합군은 재령평야에 자리한 백성으로 후퇴했다.
연합군과 당군이 개돈양에서 충돌하지는 않았지만 신라가 고구려 부흥군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당에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어느덧 여름이 지났다. 사야도(士也島·소야도) 해변의 바람은 서늘했다. 바닷가를 거닐던 안승(安勝)은 바위 무지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안승은 새삼스럽게 해안을 둘러봤다. 사야도는 지난날 백제를 치기 위해 출정한 소정방이 당군을 이끌고 상륙했던 곳이었다. 그는 바다를 보며 평양성으로 새까맣게 몰려들던 당나라 군사의 아귀 같은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밀려드는 파도의 흰 거품 속에서 일그러진 얼굴의 당군이 피 묻은 칼을 휘두르며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안승은 섬뜩한 기억을 떨쳐 내기 위해 도리질을 쳤다.
이때, 수평선 너머에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안승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당군의 추격을 피해 궁벽한 섬까지 도망쳐 왔건만 이곳마저 그들의 손길이 뻗쳤다면 더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가 낙담하고 있는 동안 배의 윤곽이 점점 선명하게 드러났다.
안승은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그는 도망 다니는 일에 지쳐 있었다. 이쯤에서 가슴 졸이는 생활을 끝내고 싶었다.
 
해변에 도착한 배는 바닥이 낮고 두 개의 돛을 단 전형적인 고구려 어선이었다. 뱃머리에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고집스럽게 보이는 각진 턱이 두드러지는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바위 무지 앞에 서 있는 안승을 발견하고는 바로 배에서 뛰어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찾았네요.” 
그는 뛸 듯이 반가워하며 안승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안승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서 사내를 쳐다봤다. 마냥 기뻐하는 상대에게서는 어떤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소인은 대형 검모잠(劍牟岑)이라고 합니다.”
그의 손이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안승은 사내가 고구려인임을 알고 적이 안심했다.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당나라에서 어떤 간계를 썼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승은 떨려 오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지금 고구려 전역에서 당에 대한 저항이 초원의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록 도성이 함락되고 보장왕 폐하까지 저들에게 끌려갔지만 백성은 여전히 고구려인의 긍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왕자께서 나서셔야 할 때입니다. 백성의 구심점이 되어 주십시오.”
검모잠의 열망은 갓 잡은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뜨거운 기운이 안승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웅크리고 있던 심장이 차츰 빠르게 뛰었다.
 
검모잠은 수림성(水臨城) 출신으로, 성주였던 부친의 후원으로 중앙 관로에 진출했다. 이 당시, 고구려 조정은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인척과 그 측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런 실권이 없는 보장왕은 그저 대막리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높은 벼슬을 원한다면 연개소문의 측근과 긴밀히 교제해야 했다.
검모잠은 당과의 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개소문의 뛰어난 능력은 인정했지만 부패한 정권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왕권을 회복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군신 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를 바랐다. 그것만이 나라를 안정시킬 길이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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