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13] 욕정과 순종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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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5-28 06:25:00

푸른 점퍼를 입은 또 다른 한 명은 명함이 없노라며 이름을 말했는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못 알아들었다. 희숙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대로 미인이십니다. 미미산업 노조위원장이 벌써 몇 잔을 들이켰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노조위원장의 시선이 희숙의 가슴에 머물자 희숙은 얼른 고개를 돌려 변태섭을 쳐다봤다.

희숙이 변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노조위원장이 희숙을 보고 미인이란 소리에 변태섭은 내가 뭐랬냐는 듯 만족한 미소만 지으며 연거푸 잔을 비웠다. 희숙도 오랜만에 무장 해제한 군인처럼 술을 마셨다. 소주 서너 병이 돌 무렵 옆자리에 앉은 명함 없다던 남자와 변태섭이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자리를 바꿨다. 희숙 옆자리에 변태섭이 앉자 희숙은 기분이 좋아졌다. 변태섭은 변한 게 없었다. 말수 없고 무뚝뚝한 부산 남자 모습 그대로였다. 희숙은 변태섭이 자기한테 무심한 건, 태생이 ‘부산’스럽거나, 여자 경험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태섭은 상 밑을 더듬어 희숙의 원피스를 걷고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희숙은 당황했다. 일행이 봤을까 싶어 얼른 횟상 앞으로 몸을 바짝 당겨 앉았다. 변태섭의 행동은 과감했다. 희숙에게 귓속말하는 것처럼 귀에 입술을 갖다 대더니 혀로 귓불을 간지럽혔다. 희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이 들어간 상태라 희숙도 변태섭도 흥분됐지만 일행이 있는 자리라 희숙은 달아오른 감정을 자제하려 변태섭의 몸에서 좀 더 떨어져 앉았다.

그럴 때마다 변태섭은 희숙 쪽으로 다가와 앉았다. 희숙이 벽 쪽에 기대어 앉았다. 희숙의 허벅지를 더듬던 변태섭의 손은 어느새 희숙의 팬티 속까지 들어왔다. 희숙이 변태섭의 손을 저지했다. 있는 힘껏 힘을 주어 변태섭의 손을 뿌리쳤다. 눈으로는 일행이 눈치채지 않았는지 살폈다. 희숙이 변태섭의 손을 거부하자 변태섭은 손을 거두고 코웃음을 짓더니 잔에 채워진 소주를 단숨에 비웠다. 갑자기 변태섭이 희숙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섰다. 잠깐 따로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변태섭은 술을 많이 마신 사람답지 않게 또박또박 말했다. 손을 뿌리쳐서 화났나. 왜 이러지. 희숙은 불안했다. 변태섭은 가게 문을 나서 바깥에 있는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변태섭이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었다. 월미횟집 뒤로 횟집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뒷골목은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갈 정도로 협소했다. 화장실 지린내가 유난히 나는 한 횟집 벽면에 리어카가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리어카 옆으로 길게 골목이 이어져 있었다.

변태섭은 희숙의 손을 잡고 골목을 따라 걸었다. 골목 끝에 짓다 말고 방치된 빈 건물이 있었다. 벽돌이 쌓여 있고 공사 자재가 널브러져 있었다. 인기척이 나자 널빤지 아래 숨어 있던 들고양이들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변태섭은 빈 건물 내부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희숙의 손을 잡고 건물 안쪽으로 걸어갔다. 희숙의 발에 나무토막이 걸려 넘어질 뻔하자, 변태섭은 희숙의 팔목을 세게 감아 잡았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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