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12] 특별한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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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5-27 06:25:00

오랜만에 변태섭이 희숙을 호출했다. 예쁘게 하고 와. 변태섭이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닌데 웬일일까. 예쁘게 하고 오란 말은 여자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소개할 사람이 있거나, 특별한 시간을 갖고 싶다거나. 암튼 평소와 다른 이벤트가 있다는 말이다.

희숙은 권지호가 사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예쁘게 하고 오란 말에 동이가 쓰는 색조화장품을 빌려서 발라 봤다. 희숙은 화장해 본 적이 없다. 할 줄 몰랐다. 얼굴에 덧바른 느낌이 별로였지만 거울에 비친 희숙의 얼굴은 민낯보다 훨씬 예뻤다.

참말로, 누구 만나는데 얼굴에 분을 다 바른다냐. 남자 경험이 없을 것 같은데도, 동이는 기초화장품부터 색조까지 달랑 스킨로션과 니베아나 바르는 정도인 희숙이보다 화장품이 많았다. 여자랑 집구석은 꾸미야 한당게. 그라고 데이트할찌게 말이지, 언제 덮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화장도 하고 속옷도 예쁜 거 입어야 되야. 남자들이 벗겼다가 젤로 실망하는 게 브라쟈랑 빤스 색깔 다른 거라 글더만, 그라고 고무줄 늘어난 빤스 보믄 고치가 팍, 죽어뿐다더마잉. 고무줄 늘어난 건 공장서나 입고 남자 만날 땐 젤로 예쁜 거 입고 나가라잉.

희숙은 빙그레 웃다 말고 생각했다. 세트로 된 브래지어와 팬티가 없었다. ‘다음엔 속옷도 신경 써야겠구나.’ 월미도 공장이 인천에 있긴 해도 인천 바다 한번 가 보지 못했다. 부산 바다를 보고 자라서 바다엔 감흥이 없던 터라 공장 언니들이 송도 유원지나 월미도로 놀러 가자고 하면 늘 거절하곤 했다. 변태섭이 월미도에서 보자 하고 예쁘게 하고 오라 하니, 희숙은 아침부터 기분이 들떴다. 아버지가 보내 주신 크림색 구두를 신고 이리저리 걸어 봤다. 아버지는 구두를 자주 안 신으면 쉬 삭는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입학식 때 한 번 신고 신을 일이 없어서 보관해 둔 구두를 한 달 전 공장 동료 결혼식에 신고 갔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데 구두 밑창이 떨어져 당황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른 쪽 밑창마저 떼어 내야 했다. 수선한 구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데이트를 위한 점검은 끝났다. 주안역에서 인천역까지 다섯 정거장밖에 안 됐다. 인천역에서 월미도로 가는 버스를 탔다. 월미도 놀이공원 근처로 음식점과 커피숍, 숙박업소들이 질서 없이 뒤섞여 있었다.

월미횟집. 미닫이를 열고 들어갔다. 가게는 주말이라 사람들로 가득했고 시끄러웠다. 홀 가장자리에 있는 방에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변태섭이 희숙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거의 미끄러지듯 변태섭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홀에서 보면 안 보였던 일행이 둘이나 있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희숙을 환영했고 희숙은 좀 전의 방정맞음을 후회하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어서 와요. 변태섭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변태섭 옆에 앉은 남자가 횟상 위에 이미 준비해 둔 명함을 희숙에게 내밀었다.

인천 주안 산단 지역에 있는 회사였다. 미미산업 제1영업분과 노조위원장 김○○. 희숙은 명함을 받아 들곤 웃으며 말했다. “제가 다니는 공장 근처 같아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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