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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 계곡에서 윤동주문학관을 거쳐 환기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그날, 험난했다. 인왕산 길을 걸으면 되는 것으로 쉽게 생각했다. 여러 번 가본 길이던 까닭이다. 학생들 스무 명 남짓을 안내해야 하지만 몇 번 가본 길이다.
인왕산 스카이웨이 쪽으로 곧장 올라가 포장도로를 이용하면 쉽지만 도시생활에 지친 학생들에게 숲속길의 아기자기함, 고즈넉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뿔싸. 아차 하는 사이에 길을 잃었다. 숲속 갈림길에서 윗쪽을 택해야 하는데, 그만 아랫쪽을 선택한 것이다. 잘못 온 걸 깨달았다면 아깝더라도 돌아가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을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창의문 인근은 인왕산록과 오래된 주택가와 산을 타고 닦은 도로들이 얽혀 몇 번씩 걸음을 멈추고 구글 지도를 봐야 했다. 참다 못한 학생들이 앞장을 서주어 민망한 꼴이 되어서야 겨우 윤동주문학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제 시간을 따져봐야 했다. 학생들은 이후 스케줄이 있을 수 있고, 서울 시내 답사 코스로는 경복궁역에서 출발, ‘이상의 집’에서 윤동주 하숙집을 지나 수성동 계곡, 이제 여기까지 벌써 두 시간 반을 훌쩍 넘겼다. 여유 없이 문학관 관람으로, 감동적인 윤동주 영상도 배고픈 사람이 숟가락으로 떠먹듯 마친다.
그날의 마지막 코스가 환기 미술관이다. 리모델링 이후 와보지 못한 곳이어서 나부터 기대가 컸던 방문이다. 단체 관람으로 겨우 예산을 맞추어 마련한 곳이다. 청년들에게 추상화가로 얼마나 다가설 수 있을까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김환기(金煥基, 1913.4.3~1974.7.25)는 호는 수화(樹話), ‘나무의 이야기’다. 더할 나위없이 시적이다. 전라남도 진도태생으로 일본 니혼대학에서 공부했고, 1946년에는 파리로 가 세계 화단 속에서 작업했고, 1963년 이후에는 뉴욕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일제시대에 문학인들, 미술인들은 늘 양행(洋行)을 꿈꾸었는데, 이 김환기와 또다른 화가 이응노(李應魯, 1904.2.27~1989.1.10)들이 해방 후에야 파리행으로 뜻을 이루었다.
김환기의 파리행 속에는 변동림(卞東琳, 1916.2.29~2004.2.29)이라는 이채를 띤 아내, 여성화가이자 수필가의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 변동림은 주지하듯이 이상의 아내였고, 그가 도쿄에서 세상을 떠난 후 1940년경 수화를 만나 1944년 결혼한다. 이때로부터 변동림은 수화의 아명 향안(鄕岸)을 얻어 김향안으로 살아간다.
변동림은 일제 말기에 일문 소설 발표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전문적인 수필가로서는 여성들 가운데 가장 앞에 서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나는 그의 수필집 ‘파리(1962)’를 생각한다.
허겁지겁 당도하기는 했으나, 이제 전시실 앞에 서자 마음이 가라앉는다. 학생들에게 몇 가지 짧은 안내를 하고 나는 나대로 내가 며칠 사이 그려온 수화의 추상화 앞에 앉았다. 전시실에는 시간을 들여 볼 수 있도록 한가운데 작고 긴 사각 의자가 놓여 있다.
면. 넓은 추상의 면. 그중에서도 코발트블루 빛에 가까운 수화의 ‘무한공간’, 그 삶의 심연의 표현을 나는 사랑하는가 보다. 이 앞에 있으면, 내 겪어온 모든 우여곡절, 시련과 세상의 고통도 씻어지는 듯하다. 사람에게는 이 깊은 평화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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