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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고 동물도 흐르고
흐르는 것이 너무 많다.
(천상병, 「흐름」 中)
검은 고양이가 잔잔한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떠나 없다. 큰비가 내려 홍수가 범람한다. 그런 와중에 다섯 동물이 배를 타고 새로운 곳으로 흘러간다. 그곳은 천국일까.
‘플로우(2024)’는 고요히 흐르는 애니메이션 영화다. 두 의미에서 적요하다. 음향의 음량과 느낌이 조용해서 그렇고, 음성이 없어서 그렇다. 이 영화의 상황 설정은 성경의 창세기 속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킨다. 폭우가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이었음을 기억하면, 인간의 이기적 탐욕이 깃든 말소리가 사라진 배경은 백수(百獸)의 본연적 열망을 경청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한다.
‘플로우’를 관통하는 흐름과 그 유동성에 연동된 2중성에 주목하면, 영화의 흐름 속으로 자연스레 합류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요 동물 다섯 마리와 그 짐승들을 감싸는 백수(白水)가 흐름의 이중체로 현상하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이동을 통해 변화하는 다질성(多質性)은 흐름의 한 속성이다. 한편, 두 이질적 속성이 공존하는 캐릭터와 대상의 이미지를 복사하는 일종의 ‘거울’을 포괄하는 용어로 2중체를 활용해 볼만하다. 용어의 범위를 이렇게 설정하면 이해의 유역이 오독으로 흐를 위험을 차단할 수 있다.
영화는 깨끗한 물웅덩이에 비친 흑묘(黑猫)의 얼굴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이 흑묘는 가장 큰 비중을 점한 동물 캐릭터이므로 왜 이 영화가 흑묘의 거울상으로부터 발원했는지 궁리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기에게 거울로 자신의 외형을 응시하는 일은 그(녀)에게 큰 흥미를 준다. 그 조응은 자신의 내면과 존재를 성찰하는 데로 이어진다.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이 연출했던 애니메이션 영화 ‘어웨이(Away, 2019)’의 제2챕터 ‘거울 호수(Mirror Lake)’에서 주인공 소년의 자성(自省)이 청명한 호수면으로 상징화됐음을 참고하면, 물의 이 이중화 기능이 ‘플로우’에도 유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연속성을 고려할 때, 고양이가 자신의 이미지를 보는 것은 모든 동물의 내밀한 마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동물이 인간 중심의 계층에서 주변적 하위에 종속당하는 점을 떠올리면, 동물은 인간이 없어진 세계에서라야 자기 존재의 고유한 독립적 의미를 깊게 성찰할 수 있었을 터이다.
자신의 개성을 예리하게 변별하려면 주위의 타자들을 둘러보는 일도 필요한 법. 다섯 동물은 각자 다른 맥락에서 이중성을 지닌다. 검은 고양이와 골든 리트리버는 개와 고양이의 상극 관계 및 흑색과 황금색의 대비라는 점에서 둘로 나뉜 이중체다. 뱀잡이수리는 땅바닥을 기어다닐 수밖에 없는 뱀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수리가 결합된 명칭의 동물이라는 점에서 이중체다. 상이한 동물의 두 이름이 합쳐진 여우원숭이도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비춰 본다는 점에서 이중체다. 카피바라는 물속과 물 밖의 육상을 넘나드는 생활 양상을 띠는 반수생(半水生) 동물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이중성을 지닌다.
왜 이 다섯 이중체는 하늘로 우뚝 솟은 돌기둥을 향해 바다를 건널까? 그 답도 물의 이중성에서 찾아볼 만하다. 흑묘가 수면을 바라보는 장면을 더 자세히 재분석해 보면, 고양이의 시선이 위로부터 아래로 향함을 알 수 있다. 깊이는 높이와 통한다. 그러므로 복제된 이미지에 도달한 눈빛은 상승하여 망막에 투영됨으로써 자성을 유도한다. 고양이가 높은 곳을 오르거나 위쪽을 쳐다보는 장면이 많은 것도 더블 이미지 사이의 낙차에 연관된다.
장면 전환도 유연한 흐름을 보여준다. 돌기둥 정상에 드디어 도착한 흑묘와 뱀잡이수리! 둘의 심장은 얼마나 고동쳤을까. 그 순간, 물방울들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금수(禽獸)도 붕 떠오르면서 황량했던 봉우리는 금수(錦繡)처럼 찬란한 오로라 빛으로 휩싸여 간다. 찬연한 광채가 차츰 희미해지면서 다시 돌기둥으로 돌아온다. 영롱한 빛들로 아롱진 이 판타지 장면은 그 초현실성이 영화의 약점으로 지적될 면도 있다. 그러나 높은 곳에 도달한 고양이의 날 듯한 기쁨을 상당히 부드러운 흐름의 전환으로 이미지화한 은유적 장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판타지 도입의 인위성을 덜어내는 면도 있다.
인위성은 애니메이션 영화가 동물 캐릭터를 인간 중심적으로 디자인해 온 흐름을 반영하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녀 배달부 키키(1989)’에서 작고 앙증맞은 흑묘가 주인공 ‘키키’가 갖춘 마녀로서의 정체성과 소녀로서의 귀여움을 드러내는 보조 캐릭터라면, 모리타 히로유키 감독의 ‘고양이의 보은(2002)’은 고양이와 까마귀가 주도적 인격체로 활약하는 판타지 스토리로서 그 자체가 여고생 ‘하루’의 몽상을 펼쳐낸 영화로도 다가온다. ‘플로우’는 자신의 모습과 의미를 오롯이 성찰하고 정초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동물에게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이전의 두 흐름과는 유로를 달리한다.
이렇게 이 영화가 인간 중심의 관점을 걷어내려는 태도로 동물의 행동 특성과 감정을 섬세한 입체적 그림체로 형상화한 작품임은 맞으나, 결국 인간의 시선에서 제작된 산물이기에 인위성을 완벽히 지우지 못했음도 사실이다. 동물들이 협력하여 카피바라를 구하는 장면은 인간의 손길이 서린 예다. 하지만 동물의 관점을 최대한 존중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히 감지된다는 점에서 인위적 연출의 작위성을 꽤 성공적으로 완화한 영화임도 충분히 인정될 만하다.
상선약수라는 표현이 있듯, 천국은 흐르는 것들의 흐름을 자유롭게 흐르도록 허용하는 세계가 아닐까? 그래서 영화의 엔딩이 깊은 울림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것 같다. 수면에 비친 자기를 보고 있는 흑묘를 본 골든 리트리버, 여우원숭이, 카피바라가 물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도 함께 바라본다. 이 수미쌍관은 영화 전체를 순환적 흐름으로 만든다. 그 흐름에 시나브로 합류한 사람은 동물들의 맑은 눈을 명경지수로 삼아 어느새 자기 모습을 호젓이 보고 있으리라.
영화 ‘플로우’ 줄거리
사람들이 없는 숲속에 홀로 남은 흑묘는 골든 리트리버, 뱀잡이수리, 여우원숭이, 카피바라와 홍수를 거치고 바다를 건너 돌기둥에 올랐다가 숲으로 돌아오는 모험을 경험한다.
감독 긴츠 질발로디스 소개
1994년 라트비아 출신의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대사 없는 고요한 상징적 세계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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