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영 화가(70·남) 화가는 올해 화가 활동 50주년을 맞이했다. 그는 특정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사실화, 추상화 등 여러 장르를 추구한다. 김 화가는 1968년 대학교를 졸업한 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사가 됐다.
“학생들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는데 회의감이 들었어요. 물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굉장히 훌륭한 일이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그림 그리는 일인데 이곳에만 머물러 있구나’라는 생각에 견딜 수 없었죠. 과감히 학교를 떠났습니다. 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였죠”
그는 학교에 부임한지 2년 반 만에 교정을 떠나 지인의 소개로 아메리아라는 회사에 입사하며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곳에서는 주문이 오는 그림을 그렸지만, 원했던 그림을 실컷 그리며 그림에 대한 기본기를 다질 수 있었다.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미국에 수출됐다. 임금도 웬만한 대기업 수준이었다.
그는 1973년 다시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아메리아 경험으로 직접 화가를 모집해 회사를 차렸다. 선 샤인의 줄임말 선산이라고 회사 이름을 붙였다. 당시 군에 입대하기 전이었다. 그는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줄 알았다.
갖은 고생 끝에 거장으로 성장…아내 수술비 그림으로 대답하기도

“결국 1년 반 만에 문을 닫았어요. 바로 군에 입대했죠. 군 복무하며 참 많이 생각했어요. 제대한 뒤 다시 회사를 차릴까 하다 화랑이 모여 있는 서울 삼각지에 입성했죠.”
김수영 화가는 1976년 화가 400여명이 활동하는 서울 삼각지에 화랑을 차렸다. 삼각지 화랑 출신으로 박수근과 이두식 화백이 유명하다. 박수근 화백은 강원도 춘천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그렸다. 이두식 화백은 추상 미술의 대가다.
“주로 주문 받는 그림을 꾸준히 그렸어요. 무엇보다 국내에서 제일가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등 각종 공모전에 15년 이상 꾸준히 참가했죠. 다른 공모전에선 30번 이상 수상할 동안 대전에서는 3번 입상했어요. 우리나라 그림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상이죠.”
화랑에서 그리는 작품들은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고가가 아니다보니 일반 장사처럼 박리다매해야 했다. 얼마 안 있다가 외환위기가 사태가 터지면서 김 화가는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힘든 시기를 맞이했다. 심지어 중앙의료원에서 7500원에 피를 팔아 쌀 세말을 사 끼니를 이어가기도 했다.
“아내가 갑자기 아파서 수술을 받았어요. 당시 의료보험도 적용받지 못하던 시절이라 수술비가 200만원이나 나왔어요. 감당할 수 가 없어서 고민 끝에 가장 열심히 작업한 작품을 들고 의사를 찾아가서 지금은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미래에는 무한 가치의 작품이 될 것이니 받아달라고 말했죠. 놀랍게도 수술비는 10만원으로 깎였죠.”
시련이 찾아와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시내 지하철 약 180개역에 걸어 놓을 그림 3000개 가량을 그려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그는 지긋한 나이에도 활발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으로 팔로워만 1만5000명에 이른다.
“얼마 전엔 유럽의 팔로워가 제 작품을 보더니 꼭 사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는 주로 한국정서가 녹아있는 대중적인 그림을 많이 그린 편인데, 그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무척이나 보람을 느끼죠.”
40년 넘게 지켜온 삼각지 화랑…역사에 남을 대작 그리고 싶어

“예술작품들을 전시회에서만 접하는 우리 국민이 무척 안타까워요. 저는 어느 집에 초대를 받으면 그 가정에 그림 작품이 얼마나 있는지부터 살펴봅니다. 비싼 와인은 자랑스레 전시하면서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예술 작품 한 점 없다는 건 삶을 척박하게 만들어요”
김수영 화가는 그림 작품에 대해 사치나 전시 용으로 생각하는 국민 인식의 문제를 지적했다. 대중적인 그림 작품도 인테리어나 집 안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삼각지도 인사동 못지않게 화백들의 메카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어요. 역사와 전통이 숨 쉬고 있는 곳이죠. 이곳에 남아있는 화가들이 더 노력해야죠”
그는 대중적인 그림 외에도 본인이 평소 즐겨그리는 추상화를 그려 인생의 대작을 남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지현 기자 / 판단이 깊은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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