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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서정주의 시 ‘자화상’의 도입부다. 애비가 종이었으니 그가 종의 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종은 대물림되는 게 보통이지만 그는 종이 아닌 주인이 되었다. 서정주라는 인물에 대해 평이 엇갈리긴 하지만 나에게 그는 아름다운 시를 쓰는 ‘서정의 주인’일 뿐이다. 성명학은 확실히 신빙성 있는 학문이다.
그런데 ‘애비는 종이었다’를 ‘애비=종’이 아닌 ‘애비=종이’로 읽으면 어떨까. 이렇게 아재개그를 치고 보니 떠오르는 분이 있다.
그분은 늘 자신을 습자지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마음이 약해 습자지처럼 잘 찢어지니 살살 다루어 달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그 앞에서는 누구나 말을 조심한다.
그런데 그 습자지 사장님이 직원을 다루는 것을 보면 가죽 채찍 그 자체다. 사사건건 얼마나 엄격한지 직원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 목소리를 높이다 못해 폭언도 예사다. 직원은 사장님이 찢어질까 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다.
그 회사는 행사가 잦아 화분이 많이 들어오는데 습자지 사장님은 식물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들어온 화분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전부 키운다. 그 회사를 방문할 때마다 식물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식물을 좋아하는 나로선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직원들이 화분을 가꾸느라 얼마나 힘이 들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곳에 일이 있어 들렀을 때였다. 복도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화분 하나가 죽어 계단에 방치된 것이 사장님 눈에 띈 모양이었다. 사장님은 직원들의 무책임과 부도덕성을 질책하느라 바빴고, 나이 든 임원은 고개를 조아린 채 어쩔 줄 몰라했다.
습자지 사장님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모든 인간은 다 종이의 자식이라는 것. 내가 습자지면 남도 습자지라는 것. 누구라도 폭언을 들으면 자존심에 금이 가고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악플이나 악성 민원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또 얼마던가.
그 사장님, 망가진 한 개의 화분을 보고 야단치기보다 잘 건사한 99개의 화분을 칭찬해 주면 어땠을까. 업무 외의 일까지 신경 써야 하는 직원의 입장을 헤아려 보면 어땠을까. 내가 찢기길 원하지 않는다면 남도 찢지 말 일이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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