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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의 전라도에서] 그대의 겨울을 위하여
어젯밤 내내 밤이 새도록 불렀던 변함없는 얼굴
온몸에 하얀 눈꽃드레스 입고 내게 오는 ‘당신’
정재학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2-11 09:28:19
 
▲ 정재학 시인·칼럼니스트
은빛 겨울길은 반짝이는 사랑이었습니다. 머얼리 눈 닿는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 한 먼 길까지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직 이 길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단 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길은 갈 곳을 결정한 사람들만의 공간입니다. 당신이 나를 향해 떠났음으로, 나 역시 길 위에 있어야 합니다. 흔한 마중이겠지만, 실은 만남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오늘 하루 길 위에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잠시 길가의 고목이 되어, 바람 속에 움직이지 않는 고정핀이 되어봅니다. 떠도는 바람들은 서로 돌고만 있다는 단순한 이치에서, 지금은 기다림만이 옳은 줄 압니다.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가장 빠른 만남일지도 모릅니다.
 
아침나절에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웠습니다. 잿불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았습니다. 눈길을 걸어올 당신에게 줄 것입니다. 어느해 겨울 밤늦은 귀가길에 붕어빵 한 봉지를 사들고, 늦도록 기다리는 당신에게 가는 마음처럼 설레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을 기다려야 할 차례입니다.
 
흐릿해집니다. 약해지는 시력을 따라 기다리는 마음도 촛불처럼 기력을 다해갑니다. 발을 움직여 조금씩 당신이 오리라 싶은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행복한 기다림도 시간이 흐르면 지쳐간다는 사실에 온몸이 아파옵니다. 어쩌면 오늘보다 당신도 모르는 내일날은 오늘보다 더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눈이 내려옵니다. 발자욱이 생겨납니다. 여기까지 두 줄의 흔적이 남았을 뿐입니다. 누군가 이 발자욱을 보더라도 그리움까지 읽지는 못할 것입니다. 가끔씩 멈춰서서 발끝을 세우고 좀더 멀리보았던 안타까움은 더욱 읽을 수 없을 겁니다.
 
눈발이 가로막은 시야에 멀리 한 점이 보입니다. 한 점은 곧 직선이 되고 미소를 띤 나의 여인이 되어갑니다.
 
당신은 하얀 눈꽃화관을 쓰고 하얀 눈꽃드레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아주 멀리서부터 나를 향해 웃고 있었나 봅니다. 당신은 걸어오는 동안 눈을 맞고 있었을 겁니다. 웃음 띤 검은 눈동자가 점점 커다랗게 방울지고 젖어가고 있었습니다. 만나지 못하여 아프게 지나간 오랜 시간의 흔적이었습니다.
 
온몸이 눈으로 덮인 당신의 어깨를 털어줄 때 눈빛드레스도 걷어 내려집니다. 부드러운 머릿결 위에 손을 올려 하얀화관을 벗기고, 추위에 붉어진 얼굴을 감싸봅니다.
 
오래도록 눈길을 걸어왔을 당신의 차거운 발끝에서 맥박 위로 걸어오는 호흡은 작고 낮게 뛰고 있었습니다. 쌔근거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지그시 바라봅니다. 때때로 당신의 어여쁜 눈동자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 후우! 입김으로 쓸어봅니다. 패딩점퍼 기다란 옷 위 눈에 가려진 모자를 벗겨봅니다. 어젯밤 내내 밤이 새도록 불렀던, 변함없는 얼굴과 이름의 당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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