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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제국의 꽃’ [245·끝] 잿더미 위에서
대한을 지켜 낼 것이다
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2-29 06:30:20
 
 
 
 
중전, 중전 어디 계시오?”
 
건청궁 옆 녹산에는 솔향이 가득하다. 광무 황제는 명성황후의 손을 꼭 잡고 봄 날 산책을 즐기고 있다. 황후는 분홍색 저고리에 청록색 치마를 입고 있다. 반짝이는 이마가 유난히 돋보인다. 황후가 황제를 돌아보았다.
 
폐하, 폐하께서는 종묘사직을 보존하셔야 하옵니다. 신첩이 함께하지 못하여도 폐하께서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중전?”
 
광무 황제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황후의 모습이 사라져 갔다. 연기처럼 구름처럼 아스라이. 황제는 사방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것이 자욱하게 밀려왔다.
 
폐하, 폐하! 일어나시옵소서. 큰일이 났습니다.”
 
강 내관의 목소리에 황제는 눈을 떴다. 코끝에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궐이 불타고 있사옵니다.”
 
황제는 의관을 챙길 사이도 없이 밖으로 나섰다. 늦은 밤이었다. 항상 새벽에야 침전에 드는 황제가 이 날은 초저녁에 눈을 붙였고, 그 사이 화마가 경운궁을 덮쳤다.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을 수리하던 중, 아궁이에서 발화한 불이 중화전과 즉조당·경효전과 흠문각 등 중요 전각들을 태웠다. 1904414일의 일이다.
 
봄바람을 만난 목재 건물들은 뜨겁게 타올랐다. 황제의 어진과 황태자의 화상·경효전에 모신 신주는 간신히 이봉하였으나 피해는 상당했다. 침전에 둔 금고가 녹아 내려 챙겨 두었던 일본 지폐가 다 소실되었으며 문부·서책·무기도 다 없어졌다. 전래로 보관되던 서류·금보·그림도 사라졌다. 폐허가 된 경운궁에서 황제는 망연했다. 이용익이 수옥헌으로 달려 들어왔다.
 
폐하, 이 참담함은!”
 
이용익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모두 짐의 부덕의 소치 아닌가.”
 
황제의 음성이 떨렸다.
 
경복궁으로 이어하심이 어떠합니까, 폐하? 이곳은 이제 안전하지 않사옵니다.”
 
이용익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곳은 대한을 선포한 곳이 아닌가! 짐은 살든지 죽든지 이곳을 지키려 한다.”
 
황제가 결연하게 말했다. 대한은 무럭무럭 자라났으나 외부 환경은 대한을 지켜주지 않았다. 러시아와 암투를 벌이던 일본의 침공으로 러일전쟁(1904.2.8.)이 일어났다. 초반에 승기를 잡은 일본은 곧바로 서울을 점령했고 러시아 공사는 서둘러 대한을 떠났다. 전쟁의 기미가 보일 때부터 대한은 중립을 선포했으나 실효가 없었다.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한일의정서(1904.2.23.)를 체결했다. 대한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행정과 군사를 장악하는 조약이었다.
 
한일의정서의 내용이 관보에 보도되자 백성들은 내용을 성토했고 협약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견제 세력인 러시아가 무력해진 상황에서 일본의 힘을 제어하기는 힘들었다. 광무 황제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난감했다. 요즘 들어 경효전을 찾아 명성황후의 신주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황제가 서둘러 양성한 3만 명의 신식군대는 100만의 일본 대군 앞에서는 힘이 부족했다. 미국은 일찍이 대한에게서 등을 돌렸고 일본은 국제적으로 침략을 공인받은 상황이었다.
 
내 한 몸이 죽더라도 대한은 지켜 내야 한다.”
 
연기가 자욱한 경운궁 안에서는 제국의 꽃, 이화(李花)가 시리도록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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