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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으로 가서 맥주 한 캔을 더 가져오던 나는 아내의 방 앞에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불을 켰다. 집에서 제일 크고 환한 방이었지만 아내의 온기와 화구가 사라진 공간은 쓸데없이 넓었다. 맞은편 벽에 그림 한 점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모과나무와 당신이야.”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이 집에 와서 완성한 아내의 유일한 그림이었다.
여름방학에 맞춰 이사하고 몇 번, 보름달처럼 배가 부풀어 오른 아내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마당에 나와 앉아 스케치를 했다. 이 집이 마음에 드는 거야, 나는 아내를 바라보며 잠시 흡족했었다.
“나무를 바탕으로 썼어, 독이 올라오지 않게 하느라 작업하는데 애를 좀 먹었지. 그 위에 아크릴을 바르고 유리 가루를 덮은 거야.”
아내가 말한 작업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어스름을 닮은 짙푸른 빛을 배경으로 내 얼굴이라고 생각되는 커다란 덩어리가 마치 모과처럼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아내가 흩뿌려놓은 미세한 유리 입자들이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파란색이 마음에 들어.”
두 손으로 양 눈두덩을 몇 번 문지르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맨 밑에 검정을 먼저 칠하고 밝은색을 그 위에 칠하면 색감이 깊어지거든. 상처와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들을 물감 속에 농축시키고 숙성시킨 다음 핵폭탄처럼 화폭에 투하하는 거야.”
아내의 설명을 듣는 동안 내 팔뚝의 털들이 곤두섰다. 그녀가 타인으로 느껴지던 날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꾸준히 개인전을 열었던 아내는 이 집에 이사를 온 뒤로는 작품 활동을 아예 그만두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데다 학교 일이 너무 바빠서 그림에 몰두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거실로 돌아왔을 때, 휴대폰 화면에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창이 떴다. 스팸 메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뭐냐고?’ 나는 질문에 반응하고 있었다.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메일함을 터치했다. 대상의 주위가 뿌옇게 흐려지며 시력이 약해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읽을 수 있었다.
‘30초 동안 생각할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가 되어 버린 듯한 낭패감, 시간 낭비라는 불쾌함, 악성 바이러스가 스마트폰을 감염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에도그 순간 흘낏, 화면 상단에 보이는 시간을 읽었다. 9시 5분 전이었다.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수십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 안압과 두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몸서리를 치면서도 화면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똑같은 질문이 한 번 더 반복되었다. 무엇을 광고하려는 것일까. 대출이나 도박, 섹스를 광고하기에는 골치 아픈 질문이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마치 ‘너는 뭔데?’ 하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두통이 곧 심해질 텐데. 진통제는 어디 있지? 빨리 약을 삼켜야 해.’ 조바심이 나면서도 ‘나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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