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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이혼을 했는데도 내가 애들 엄마를 ‘아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아내도 가끔 ‘여보’ 하고 나를 불렀다. 그때마다 흠칫, 선잠을 깬 아이처럼 나는 놀랐다. 아내는 나를 부르고는 머뭇거렸다. “당신 괜찮아?” 아내는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맥주 말고는 며칠째 음식을 입에 넣지 못했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자꾸 가슴은 아프고 바람은 시렸다. 세상은 달라진 게 없었지만 모든 게 달라졌다.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가 절실했다. 괜찮아? 누군가 물어 주었으면 싶었다. 괜찮아? 아내가 물어 주길 바랐다. 괜찮아? 누구라도 묻는다면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 괜찮지 않아. 이렇게 아픈걸. 너무 외로워서 숨도 쉴 수가 없어. 그러니까 묻지 마. 괜찮지 않아. 난 괜찮지 않다고!”
“아이들은 잘 있어.”
한숨을 가늘게 내쉬고 아내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아이들의 안부 정도는 물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비난처럼 들렸다. 이혼 후 한 달에 한 번쯤 아이들을 만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아내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나였다. 마음이 조금 더 안정을 찾은 뒤에, 아이들이 조금 더 큰 뒤에 만나는 게 좋겠다고 나 자신을 설득한 결과였다. 눈에 이상 증상이 온 뒤에야 혈육에 대한 예상치 못한 그리움이 당혹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을 만나러 달려갈 수는 없었다.
아내는 지금 내 상태를 알지 못했다. 혹시라도 내 몰골을 마주한 아내의 표정이 혐오나 경멸일까 봐, 아니 동정과 연민이라면 더 끔찍할 것 같았다. 더구나 내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기겁해 달아난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네 살 큰아이는 지하철을 달리게 하는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 멋있다고 엄지를 척 들어 올리곤 했다. 이다음에 크면 기관사가 되겠다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이를 만나지 못한 11개월, 아이의 기억은 나를 지웠을 것이다. 꿈도 바뀌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당신 보고 싶어 해, 아내가 한 마디만 해 준다면, 생일날 당신이 선물한 꼬마 기차를 제일 좋아해,라고 말해 준다면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으응.”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로 나는 대답을 대신했다.
“알았어.”
아내는 조금 전보다 더 깊고 긴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내의 목소리가 사라진 화면의 불빛이 꺼질 때까지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무엇을 알았다는 것일까. 아이들이 잘 있어서 다행이라는 뜻인지, 아이들과 함께 떠나 버린 아내에 대한 원망 어린 비명인지 나조차 나의 ‘응’을 해석할 수 없었다.
모과나무의 검은 그림자가 지친 듯 길게 누워 있는 마당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모과나무를 뽑아 내고 목련이나 벚나무를 심자고 했다. 모과의 달큰한 냄새도, 못생긴 열매도 싫다고 했다. 제 몸에 무늬를 새기듯 주황색의 표피를 벗어 놓고, 초록의 매끄러운 살을 드러내며 탈피하는 줄기는 허물 벗는 뱀처럼 징그럽다며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과를 싫어한 아내. 한 사람의 이미지는 그 사람이 가장 혐오했던 대상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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