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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이념‧젊음과 작별… 논산훈련소행 기차를 타다
1986년 5월15일. 경부선 철로변에 만발한 아카시아꽃을 보면서 나는 논산훈련소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훈련소 앞 이발관에서 머리를 밀면서 거울에 비친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을 바라보았다.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군대로 도망쳐 온 창백한 젊은이의 모습이 거울 속에 어른거렸다. 현실‧이념‧방황‧젊음… 이 모든 것과 이별하고 싶었다.
훈련소에서 신체검진을 받고 나서 내가 간디스토마(간흡충)를 앓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팔뚝에 피부반응검사를 했는데 커다랗고 둥근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 양성반응이었다.
역도부에서 운동할 때 생각보다 근육이 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알고 보니 간디스토마 때문이었다. 간디스토마는 낙동강 연안 지역의 풍토병이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민물고기 회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간이 상해 가는 줄도 모르고 운동과 과음으로 미련하게 몸을 혹사했던 것이다. 후회해 봐야 이미 지난 일이었다. 뒤늦게나마 발견하게 된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의무실에서 주는 독한 약을 먹고 치료했다.
달빛 아래 고달팠던 야간 행군의 기억
논산훈련소에서 박박 기던 일들 가운데 고산 유격장까지 밤새 야간 행군했던 것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달빛 아래 완전군장을 하고 밤새 행군했다. 정태춘‧박은옥의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유격훈련장은 전주 운장산 기슭에 있었다. 2주간의 유격훈련은 힘들었다. 고등학교 동창 녀석 하나가 조교로 와 있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유격장 아래 고산 저수지가 있었다. 구름에 묻힌 운장산의 풍경과 달빛이 내리비치는 저수지의 풍광은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평택 카투사 훈련소
논산훈련소에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친 후 평택의 미군 부대 내에 있는 카투사 훈련소로 이동해 다시 4주간 훈련을 더 받았다. 논산에 비해 평택은 훈련소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헐렁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식사의 질이 현격하게 차이가 났다. 논산에서는 멀건 국에 시커먼 짬밥만 먹다가, 평택에서는 갖가지 기름진 양식에 후식까지 먹을 수 있었다. 한동안은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애초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지원해 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내 딴에는 ‘남북의 분단 상황을 직접 체험해 봐야겠다’는 자만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전방에 갈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공동경비구역에 지원하려던 마음을 바꾸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만약 판문점에 갔더라면 어떤 형태로든 사고를 쳤을 것 같다.
미 8군 19지원사령부 법무감실
훈련을 마치고 대구에 있는 미 8군 19지원사령부 법무감실에 배치받았다. 법무감실의 영문명은 SJA(Staff Judge Advocate)였다. 공교롭게도 공동경비구역(JSA)과 영문 약자 철자의 순서가 바뀐 이름이었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한국군 지원부대장이 특별히 배려해 준 덕택이었다. “고급 인력이 미군 부대에서 운전병으로 썩으면 안 된다”며 나를 법무감실에 밀어 넣어 준 것이다.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대구의 앞산 앞에 있던 캠프 워커에서 숙식하며 시내의 캠프 헨리에서 근무했다. 카투사로서 근무하는 낮 생활은 군대 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천국과 같았다. 군화에 흙 한 번 묻히지 않고 숙소와 사무실을 버스로 출퇴근했다. 함께 근무하는 미군들도 자상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대부분 나의 상관들이었지만 계급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은 없었다. 내 영어 실력이 신통치 못했지만 의사소통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법무감실에는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을 담당하는 한국인 군무원이 한 분 있었고 카투사는 나 혼자였다. 전임자도 없었다. 아마 내가 제대한 후에는 후임자도 없었을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내무반 선임병들의 ‘얼차려’ 거부
군대 생활 중에 어려웠던 일은 주로 근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고 난 후에 벌어졌다. 비록 2인 1실의 내무반 생활이었지만 카투사들끼리 집합이 걸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한국군의 못된 악습이 카투사에도 남아 있었다. 배치된 지 얼마 안 된 초기에 선임병들로부터 얼차려를 심하게 받았다. 흔히 겪게 되는 것처럼, 원산폭격에다 앞으로 전진, 뒤로 후퇴 같은 것이었다. 구타도 종종 있었다. 몇 번 하고 나니 머리에서 손톱만 한 허연 비듬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참고 지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러한 악습에 저항하기로 했다. 미군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스트레스받는 것도 서러운 판에 같은 동족으로부터도 시달려야 한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선임병들에게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며 얼차려를 거부했다. 내가 같이 죽겠다고 나서는 데야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선임병들 중에는 어쩌다가 이런 괴물 같은 놈이 신병으로 들어오게 됐냐며 울분을 토하는 자도 있었다. 나의 이런 일종의 개인적 사보타주가 후임병을 괴롭히는 악습을 완전히 근절시키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줄이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선임병장이 되고 나서는 선임병이 후임병을 학대하는 어떤 종류의 행동도 엄격히 금했다. 신병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세상은 참 좁다. 제대한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 한 군대 후배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가 선임병장 하던 시절에 전입해 온 신병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내 왔는데 “왕따에 집단폭행을 당할 위기에서 김기삼 병장이 저를 24시간 데리고 다니면서 보호해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인터넷상에서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를 변명해 주느라 그런 글을 올린 모양이었다. 나는 잊고 있었는데 그는 고맙게도 기억해 주었다.
미군의 민주적 사법제도… 반미 등 이념 탈피의 계기
미군의 사법 집행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미군의 사법제도가 생각보다 훨씬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미군의 사법 체계가 미국의 일반 사법 체계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온갖 반미 사고에 절어 살다가 우편번호 상으로나마 —미군 부대는 우편번호상 샌프란시코(APO SF)였다— 미국의 한 귀퉁이를 실제로 경험해 보니, 미국이란 나라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이때의 경험으로 나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미국 법과대학에서 공부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군부대에서의 경험은 내가 이념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일병 시절 숙소에 이념 서적을 수십 권 갖다 놓았다. 당시 유행하던 월간 ‘말’지도 창간호부터 십여 권을 사물함 깊숙이 보관하고 있었다. ‘말’지는 광화문에 있던 논장서점에서 틈틈이 사서 모아 둔 것이었다.
초창기의 ‘말’지는 두께는 얇았지만 내용은 알찼다. 저강도 전쟁이니 하는 용어를 그 잡지에서 처음 접했다. 후에 ‘말’지는 두꺼워지면서 내용은 오히려 빈약하고 조악해졌다. 같은 방을 쓰던 선임 병장은 “인사계가 방을 검열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며 걱정해 주곤 했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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