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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년 대권 도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프랑스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56) 의원 집회가 6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열렸다. 특히 ‘사법부의 정치화’를 질타한 구호들이 다수 등장해 주목된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르펜은 이날 이탈리아 자국우선주의 정당 동맹(Lega) 행사를 위한 화상 연설하며 “굴복하지 않겠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행보에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킹 목사를 결부시킨 것은 ‘보편성’의 확신이다.
앞서 르펜과 함께 유죄 판결을 받은 브뤼노 골니쉬 전 유럽의회 의원이 언론 인터뷰에서 “예수 그리스도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결백했다”며 르펜을 두둔했다. RN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2027년 대선 유력 주자인 르펜은 지난달 31일 유럽연합(EU) 예산 유용 혐의로 징역 4년에 벌금 10만 유로(1억6000만 원)를 선고받았다. 유럽의회 업무로 채용된 보좌진이 사실상 RN 당무를 봤다는 것이다. 징역 4년 중 2년 가택연금(전자발찌 착용), 2년 집행유예이며 심지어 1심임에도 5년간 피선거권 박탈이 ‘즉시 발효’됐다.
르펜은 이날 파리 집회에서 차기 대선 출마를 위해 항소심 진행을 비롯한 모든 법적 수단의 동원을 예고했으며 지지자들에겐 “사법 독재 중단하라” 등의 플래카드가 보였다. AP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사법리스트 속에서도) 출마할 수 있었다. 마린은 왜 안 되냐”며 사법부를 겨냥해 “법복을 입고 있지만 변장한 정치인일 뿐”이라고 성토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마르세유 남부 도시 거주자인 68세 연금수급자 클로드 모렐은 “사람들이 결정하게 놔두라”며 불분명한 죄목으로 유력 대권 후보를 가로막지 말라고 촉구했다.
트럼프 미 행정부가 르펜을 지원사격 중이다. 판결이 나오던 날 트럼프는 르펜을 당선 유력 인물로 들더니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 프랑스에서도 진행 중”이라고 꼬집었으며 3일 SNS로 추가 논평을 했다. “마린 르펜에 대한 마녀사냥” “유럽 좌파가 법률을 이용해 언론의 자유를 침묵시키고 정치적 반대자를 검열한 또 다른 사례”라는 것이다. 르펜이나 트럼프의 자국중심주의를 탈냉전 30여 년간의 세계화(글로벌리즘) 부작용이 수습되는 과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극우 몰이’만으론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미국 고학력·고연봉 계층에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고 서민층을 챙기는 게 트럼프의 공화당이 됐다. 좌파·우파 기존 틀과 이미지가 깨졌듯 프랑스 역시 그렇다. 한국을 포함한 여러 고도산업사회도 비슷하다. ‘우파=부자 옹호’ ‘좌파=약자 보호’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많아졌다. 관용적 이민정책·복지제도가 납세자들이 감당키 어려운 수준에 도달했으며, 이에 불만을 드러내면 혐오표현 등 일종의 ‘차별금지법’으로 처벌받게 된 현실을 먼저 거론해야 한다. 결국 ‘서민·중산층 살리기’엔 ‘이민 제한’이 불가피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친기업 정책 방향성 등 르펜과 트럼프의 문제의식과 해법이 통한다.
2017년 첫 임기 시절 트럼프는 유엔 기조연설에서 글로벌리즘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먼저 내 나라를 잘 가꾼 기반 위에 다른 나라와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국경을 넘나드는 초엘리트들이 평등·다양성·약자 배려 등 이상주의를 내세우며 부와 명예를 늘리는 동안 서민·중산층의 삶이 무너졌음을 꼬집은 것이었으나, 당시엔 ‘천박한 자국 이기주의’로 받아들여져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결국 세계화와 일자리 해외 이전·이민 급증에 따른 백인 중산층 몰락의 분노가 2016년 트럼프 당선에 결정적이었고 그 기조를 몰아 2024년 대선 압승을 이끌어낸 것이다.
파리 보방 광장에서 개최된 6일 대규모 RN 집회에선 법원 판결 규탄이 두드러졌다. ‘내가 마린(르펜)이다’ ‘국민의 이름으로-마린 대통령’ 등의 구호가 등장했다. 당초 8000명 집회 신고된 상태였으나 1만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르펜은 이날 연설에서 “30년간 불의에 맞서 싸웠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지속 투쟁을 거듭 다짐했다. 조르당 바르델라(29) RN 대표 또한 이번 판결이 “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자 수백만 애국 시민에게 가해진 상처”라고 외쳤다. 판사 노조를 비판하며 “사법 쿠데타” “정치적 사형”에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르펜을 둘러싼 반응은 극명하게 갈린다. 센 강 건너편에선 좌익 정당들 주도로 수백명의 반대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프랑스의 극우가 미국식 권위주의를 받아들인다”며 “프랑스에 트럼프주의는 없다” “반(反)파시스트 대응”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다. 가브리엘 아탈 전 총리가 파리 교외 생드니에서 열린 중도 우파 르네상스당 회의 연설 때 현 상황을 “공화국의 시험”으로 부르며 사법부 판결을 옹호했다.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 모임에선 “드러난 RN의 본색”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협하는 정당” 등 비난이 쏟아졌다. 프랑스 시러큐스대 대표 프로그램 책임자 존 굿맨 박사는 AP통신에 “르펜 지지가 해일처럼 밀려온다 싶어 이의를 제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르펜 항소의 “비정상적 신속 진행”을 문제삼으며 “내년 여름 심리가 이뤄지도록 빠르게 진행 중인데 일반적인 형사 사건보다 훨씬 빠르다”고 유감을 표했다.
르펜의 차기 대선 출마가 설사 좌절되더라도 RN엔 바르델라라는 또다른 스타 정치인이 있다. 서른도 안된 젊음과 매력적인 외모·언변에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서사의 인물로 평가된다. 2027년 대선 이전 항소심으로 뒤집지 못할 경우 바르델라가 출마해 당선된 다음 르펜을 총리로 임명하는 대안 시나리오도 제기될 만큼 RN의 지지세 상승이 강력하다. 다만 르펜은 “당의 귀한 자산 바르델라를 너무 일찍 소진시킬” 가능성에 우려를 표한 바 있다.
르펜은 법학 명문 파리 팡테옹 아사스대 출신의 변호사다. 학부를 마치고 석사(형법)·박사논문제출 자격(DEA)과 변호사 연수 및 변호사 자격증(CAPA) 취득 후 6년간 활동했다. 전공을 살려 형사사건(국선변호인) 업무 위주였다고 알려져 있다. 2011년 초 은퇴한 아버지 장마리 르펜 뒤를 이어 RN 대표를 맡으면서 유명해졌다. 아버지가 과격한 발언으로 구설에 오르자 제명·출당시켰을 만큼 극단과의 거리두기 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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