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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폭탄’과 미·중 경쟁 격화 속에서 한국과 일본의 외교적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최근 한미·미일 정상회담에 이어 17년 만에 공동발표문을 낳은 한일 정상회담까지 열렸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21세기판 조공외교”라는 날 선 평가도 나온다.
서정근 야마나시현립대 총합정책학과 교수(재일교포 2세)는 스카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한일 양국을 미국의 52번째, 53번째 주처럼 대하고 있다”며 “역사 문제를 제외하면 타협은 가능하지만, 한국 사회의 절반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일 양국이 단순히 미국의 방파제로 머물러서는 안 되며,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다음은 서정근 교수와의 일문일답
Q. 이번 한미·미일 정상회담과 한일 정상회담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미 판이 벌어진 상태였기에 일련의 흐름을 보면서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으나, 21세기 조공 외교를 보는 느낌이었다. 문뜩 19세기 말 대한제국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국 국내에서 트럼프 관세폭탄은 자연재해 같은 것이니 잃는 것들을 줄이게끔 선전했다는 평가가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동의하기에는 좀 거북하다.
트럼프가 하는 짓은 2차대전 이후 쌓아 온 국제질서와 체제, 그 이념을 파괴하는 행위다. Pax Americana(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평화), 패권유지가 어려워지자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세워 국수주의로 질주하고 있다.
그동안 국제사회를 내다보면 적지 않은 나라에서 포퓰리즘이 만연해 왔다. 한국도 일본도, 그리고 미국까지 그 정도가 심해져, 이상적인 이념 아래 서로 정중하고 협력하여 win-win을 지향하는 것이 바보처럼 보이게 되어버렸다. 국제사회가 근저부터 뒤흔들리는 이 장면에서 한국과 일본은 그저 미국의 정신나간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약소국의 비애를 보이게 된 셈이다. 트럼프는 작년 말 캐나다를 보고 51번째 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내뱉었는데, 한일 양국은 그야말로 52번째, 53번째 주가 아닌가란 말이 나와도 그리 어설프지 않다.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가진 한일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이례적이면서 합리적인 판단이고, 수긍이 간다는 말이 일본 국내에서 오갔다. 우리가 얻은 것은 트럼프와의 교섭에 관한 조언이었다. 그 대신 잃은 것이 없었을까. 일본은 잃은 것이 없고 우리부터 얻은 것은 무엇일까. 한일 간 이슈에 관련시켜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Q.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의 회담이 한일 관계 개선의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역사 문제와 실용 외교 사이에서 어떤 균형이 필요할까?
현재 한일 정상 사이에서 개선해야 할 일이 있을까, 라고 되묻고 싶다. 정상회담 때는 미처 생각 못했겠지만, 그 2주 뒤 이시바 총리는 퇴임을 표명했다. 정상 간의 개인적인 신뢰관계를 구축하기도 전에 상대가 바뀌었다. 이 다음에 누가 되든 한일관계 ‘개선’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재명-이시바 정상 간에서 17년 만에 공동발표문이 나왔는데,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는가. 일본이 그나마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 하니 우리가 타협한 셈이다.
발표문에 적혀 있는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한일관계의 기반에 입각하여’, ‘1998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포함하여 역사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이라는 표현은 달라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박근혜·문재인 정부 때 왜 한일관계가 악화되었는가. 일본 정부는 국민들에게 설명할 때 한일조약과 청구권협정으로 인해 양국 간 현안은 다 해결되었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 해석 또한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었다는 것이다. 이견은 다 덮어놓고 양국이 나름대로 해석하자고 합의한 것이 한일조약이며, 그로 인해 식민지 지배는 한국인에게 불편을 끼친 점도 있었으나 이로운 점도 많았다는 논리다. 거기서 우리 측 ‘식민지 근대화론’이 나온다.
이런 일본의 입장과 해석을 다 인정하는 것이 실용외교라고 본다. 표현을 애매모호하고 어중간하게 하는 거다. 우리가 지난 정부 때 절반 채운 물컵을 일본이 채웠는가. 일본 측은 별로 한 것이 없는데 우리가 다가가니 트럼프와의 교섭에 관한 정보도 알려준 거다. 스스로 한국이 우리를 이용했다는 말을 하면서도, 정권이 바뀌어도 외교 노선을 계승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하니 일본 측은 전전긍긍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보수정부를 이어 대하니 안도했고, 그래서 조언도 하고 정보 공유도 한 거다. 이에 답하듯이 우리 대통령은 트럼프한테 ‘한일 간의 장애요소들이 제거되었다’고까지 했다.
우리가 역사 문제만 안 꺼내면 다른 것들은 거의 타협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받아들일까. 적어도 절반은 반대한다. 이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현실과 사실이다. 실용외교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 단순한 거래이기도 하지만, 우리 정체성과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쉽게 풀 수 없는 100년 넘게 이어지는 현안이다.
Q. 한미일 협력이 안보뿐 아니라 경제·기술 협력까지 확장되는 흐름 속에서, 일본 내 여론과 학계에서는 어떤 우려와 기대가 공존하고 있는가?
한국을 잘 아는 연구자들은 이번 한일정상회담이 무사히 마무리되면서 이재명 대통령을 걱정하더라. 야당대표 시절의 언행과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는, 한국 국내 진보진영의 비판과 비난을 어떻게 감수하고 설득하고 잠재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 하나는, ‘존경하는 박근혜 대통령님’ 발언을 떠올려 언제 변질할지도 모른다고 근심하는 거다.
일본 측은 다음에 누가 총리 자리에 앉더라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우리가 기대하는 쪽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한편 지엽적인 얘기를 넘어 더 큰 프레임으로 보는 자들도 있다. 한미일과 북중러, 동서냉전 시대로 되돌아간 것도 아닌데, 또다시 갈등과 대립의 구도가 비슷하게 가시화되면서 국익을 위해 대미·대중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한일 양국이 협조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안보에 관해서는 한일 동시 핵무장이란 구상도 있으나 일본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비현실적이다. 경제에 관해서는 이미 공급망이 글로벌화된 마당에 국가가 관여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보다, 한일이 협조해서 어떤 테두리를 만들어야 하는가를 논해야 한다고 본다.
Q. 이번 회담에서 드러난 미국의 전략적 구상 속에서 한국과 일본이 맡게 될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미국이 바라는 건 뻔하다. 자기 슬하에서 역할을 다하라는 것이다. 대만해협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주한미군도 주일미군도 일심동체가 되도록 재편성하고, 중국이 태평양으로 마음대로 못 나가게 한일 양국이 방파제가 되는 걸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롭지도 않고, 전두환·나카소네 시절 반공방파제론과 불침공모론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본다.
다만 이번에는 그 당시와 달리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대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 걱정스럽다. 예전에는 공표효과를 노린 명목적인 측면이 컸으나, 이번에는 실질적인 군사행동으로 이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더 급한 것은 경제 문제다. 경제구조가 파행성을 띤 미국 산업의 하청 노릇을 해야 한다는 문제다. 기업이 해외 투자를 하는데 상대국 파트너 없이 제조업이 돈 내고, 인력 확보하고, 생산라인 구축하고, 기술 이전하고, 판매를 하는 일련의 흐름을 통해 이익이 얼마나 날지 모르면서, 미리 정해진 비싼 렌트를 지불할 약속까지 해야 한다니 왜 투자해야 하는가.
미국정부 → 한국정부 → 한국재벌로 이어지는 압력. 얻는 것이 있어 보이니 재벌기업도 투자하되, 1995년 이건희 회장이 말한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라는 말까지 떠올라온다. 참고로 일본정부는 알래스카 LNG개발 투자를 약속했지만, 일본 기업들은 CP와 투자 리스크 문제를 들어 투자를 꺼렸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장담 못한다.
한일 양국은 대외무역의 40%를 미국과 중국 두 나라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학 무역론의 기본 원리에 따르면 관세 인상으로 불이익을 보는 자는 미국 소비자다. 그러나 수입국이 대국일 경우, 수출국이 손해를 감수하며 가격 인하를 하게 된다. 이번 케이스가 바로 이 예외적 상황이다.
단기적 불이익, 즉 기업의 손실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하위에 서서 선처를 부탁하는 현상. 거기에 대통령까지 나서야 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거다. 한편 정책 당국이 중장기적 비전을 갖고 대응책을 구상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아프더라도 한일이 함께 관세 인상을 그냥 받아들이며 경과를 지켜볼 배짱이 없었던 것이 아쉽다.
Q. 앞으로 한일 관계와 재일교포 사회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재명 대통령의 제80주년 광복절 재일동포 특별메시지도 유례없는 내용이었지만, 이번 재일동포 간담회 때 격려사는 파격적이었다. 현장에서 직접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고 했다. 특히 나이 많은 1세들은 눈물 없이 못 들었을 것이다.
재외동포 700만 명 시대, 재일동포는 다른 재외동포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예전에는 재외동포 = 재일동포였지만 지금은 다수파가 아니다. 일본에서 차별 받고, 본국에 가서도 차별받는 불편한 존재가 된 지 오래다. 2세 이후는 한국말을 제대로 못한다고 ‘반족발이’ 취급을 받았고, 조국의 품속에서 기대는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설움과 슬픔을 위로해주는 말씀이 대통령 입에서 직접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했다. 재일동포 다수의 소원은 안정된 한일관계다. 그러나 정체성과 자존심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미래지향적’, ‘가교 역할’이란 말은 반세기 동안 무수히 들어왔다. 이번 공동발표문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이제는 동어반복처럼 느껴진다. 인간으로서 삶을 이어가면 그것이 곧 미래를 지향하는 것 아닌가.
일본인들은 종종 “과거사를 고집하면서 미래지향이라… 모순이 아닌가”라고 한다.
재일동포들은 태생적으로 ‘가교 역할’을 지닌 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무거운 사명을 스스로 맡으려면 얼마나 노력이 필요할까. 이 난관을 뚫지 않으면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다.
한일관계를 비교적 원활히 하려면, 안보적 위기 상황이 생기면 된다.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지향해야 한다. 한일 양국이 중심이 되어 동남아 국가들과 함께할 수 있다. 그것이 새로운 길이라고 본다.
프로필 △야마나시현립대학 국제정책학부 총합정책학과 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펠로우(2001.10-2002.9)△주일대한민국대사관 자문위원(2018〜2020) △국제고려학회 일본지부 이사 △민주평통자문회의위원(20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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