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의성을 본관으로 하는 의성김씨 후손들은 31억원 규모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들은 해당 빌딩을 통해 수년 새 10억원이 넘는 시세 차익을 시현한 것으로 파악됐다.
16일 부동산업계 등에 따르면 의성김씨 문중의 대표단체인 의성김씨대종회(이하·대종회)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한 빌딩 한 채를 소유하고 있다. 빌딩 이름은 ‘문소빌딩’이다. 대종회는 지난 2004년 완공된 빌딩을 2009년 매입했다. 매입가는 19억원이었다.
빌딩은 지하 1층, 지상7층 구조로 돼 있다. 대지면적 242㎡(약 73평), 연면적 798.31㎡(약 241평) 등의 규모다. 빌딩 1층과 5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은 사무실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1층은 식당, 5층은 대종회 사무실 등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문소빌딩은 서울 지하철 5호선 화곡역 2번 출구에서 화곡로를 따라 강서구청 방면으로 약 500m 가량 떨어진 대로변에 위치해 있다. 입지적으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시세 상승 또한 두드러지고 있다.
강기섭 빌딩맨 대표는 “대종회가 문소빌딩을 처음 매입했을 때 토지면적 3.3㎡(1평) 당 약 2600만원으로 주고 매입했다”며 “현재는 시세가 많이 올라 3.3㎡당 3500만원 정도에 달하기 때문에 빌딩은 토지 가격만 약 25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기에 건물가격인 6억원을 더하면 이 건물의 전체 가격은 약 31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대종회는 빌딩 매입 약 8년여 만에 약 12억원의 시세차익을 시현중인 셈이다”고 덧붙였다.
태조 왕건 외손자, 경순왕 아들 김석이 시조…고려·조선시대 번창
의성김씨 족보에 따르면 의성김씨의 시조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네 번째 아들인 김석(金錫)이다. 경순왕의 두 번째 부인이자 김석의 어머니인 낙랑공주 왕씨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첫째 딸로 알려져 있다. 김석은 태조 왕건의 외손자인 셈이다.
의성김씨의 본관인 경상북도 의성군에는 삼국시대 이전 ‘조문국’이라는 작은 부족국가가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신라 경덕왕 시기에 이 지역의 명칭은 ‘문소군’으로 바뀌었다. 태조 왕건은 재위 기간 중 이 지역을 ‘의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를 지닌 ‘의성부’라는 이름을 붙이고 김석을 의성군(義城君)에 봉했다. 그 때부터 김석의 후손들은 의성을 본관으로 삼기 시작했다.
의성 지역의 과거 이름이 문소군이었던 탓에 과거 의성김씨는 문소김씨로 대신 불리기도 했다. 대종회가 소유한 빌딩의 이름이 문소빌딩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의성 김씨가 크게 번성한 시기는 김석의 8대손인 김공우의 자식들이 활동하던 시기다. 김공우의 큰 아들인 김용비는 태자첨사(정3품)를 지냈고 둘째 아들 김용필은 수사공(정2품)을 역임했다. 막내 아들인 김용주는 평장사(정2품)를 지냈다.
의성김씨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활발히 활약했다. 조선시대에 활동한 의성김씨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임진왜란 직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파견된 사숙 김성일을 들 수 있다.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류성룡과 함께 임진왜란기의 대표적인 남인이다.
김성일을 인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경상도 지역을 수습하기 위해 경상도초유사에 임명됐다. 김성일은 곽재우 등의 의병장들에 대해 물자와 병력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현지 지방관과 의병장 간의 대립이 생겼을 때 대립을 중재해 의병들이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힘쓴 공로를 인정받았다.
성균관대학교 초대 학장 심산 김창숙 등 유명 독립운동가 다수 배출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5년 9월 기준 우리나라의 의성김씨의 인구수는 총 28만7469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전체 김씨들 중에서 7번째로 많은 숫자다. 의성김씨 내에는 청계파, 약봉파, 학봉파, 귀봉파, 운암파, 남악파, 문절공파, 불구당파, 문경공파, 수사공파, 태천공파, 양소공파 등 총 12개의 계파가 존재한다.
이런 의성김씨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친 집안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의성김씨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는 심산 김창숙 선생, 일송 김동삼 선생, 김용환 선생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1879년 생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체포돼 처음으로 옥고를 겪었다. 경술국치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다.
1921년에는 단재 신채호 등과 함께 ‘사민일보’를 발간하고 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중국의 지도자였던 쑨원과 교섭해 독립운동기금을 원조 받는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1927년 상하이에서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돼 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미군정에서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됐다. 특히 그는 1946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 당했던 성균관을 부활시켜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로 개편해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의성김씨 후손인 일산 김동삼 선생도 ‘만주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1918년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1919년 독립운동 군정부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힘썼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같은 집안의 독립운동가인 김창숙이 조직한 서로군정서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1920년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 당시 이를 지원하는 역할도 맡았다. 1931년 일본군에 체포돼 강제송환 당한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37년 끝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감옥 안에서 순국했다.
의성김씨 후손인 김용환 선생은 어둠에서 묵묵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모아서 전달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당시 김용환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의 독립군들에게 독립 군자금을 전달과정에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해 독립 이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의성김씨 집안을 나락으로 이끄는 도박꾼이자 파락호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도박 중독자로 행세를 했다. 겉으로는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독립군에게 보내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명예를 내던지는 희생을 한 셈이다.
의성김씨 후손들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활약 중이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편이다. 현재 활동 중인 의성김씨 출신 정치인으로는 김윤주 군포시장, 김희선 전 국회의원, 김원웅 전 국회의원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이경엽 기자 / 판단이 깊은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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