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인재가 외국보다 크게 못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일상 교육이 없기 때문에 인민의 식견이 열리지 못하고 농·상·공업이 흥기하지 못하여 백성의 생업이 날로 영락하고 국가 재정이 날로 궁해 가고 있다. 그런데 신설된 학교는 겨우 형식만 갖추었고 교육의 방도에는 어두워서 5·6년 동안 진전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상공학교 설립은 더욱 급한 일인데 일찍이 지난해 명령을 내렸으나 아직도 개설 논의가 없다. 이렇게 질질 끌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황제의 뜻을 받들어 영어·일어·법어 학교 등 외국어 학교·법률 학교·상공학교(1899)·광무학교(1900)·모범잠업소·공업전습소 등 실업 교육기관(1902)이 설치되었다. 1909년 11월이 되면 대한제국의 국·공립학교와 사립학교 총수는 2236개교에 달하고, 1910년까지 각급 학교는 3000여 개에 이르게 된다. 대한제국이 존속된 13년간 평균적으로 매년 230여 개·매달 20여 개의 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이것은 광무 황제와 한국인들의 애국계몽 의식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보여 준다.
1907년 7월에 일제에게 교육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대한제국의 신설 학교에서는 애국계몽 교육이 실시되었다. 청소년들에게 국사와 국문을 제대로 가르치고 애국심을 함양시켰다. 바로 이 대한제국기에 항일 독립투쟁을 이끄는 ‘대한 세대’가 양성되었다. 대한 세대는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의 직접적 주체로 활동한 대규모의 민족혁명적 인재 집단을 말한다.
하지만 1907년 이후 교육받은 ‘일제 세대’ 때에는 일제의 친일 교육과 일본어 교육이 집중적으로 강화되었다. 1910년 합방 이후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고 집중적인 학교 탄압과 폐교 조치가 내려진다. 결국 1919년이 되면 사립학교 수가 690개로, 학생 수는 8만 명에서 3800명으로 급감한다. 서당은 1만6500개소에서 2만3500개소로, 서당의 학생 수는 14만 명에서 26만8000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일제가 전근대적 서당 교육의 확산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일제의 감시가 소홀했던 서당이 바로 반일 교육의 거점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