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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문 칼럼] 이 나라 만석꾼들은 언제 어떻게 사라졌을까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2-17 16:55:05
1. 피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병작반수(竝作半收)’
 
1992년도에 첫 목회지가 전남 화순 북면 임곡리 시골 교회였다. 첫 해 가을에 교회 집사님이 논에 벼 베러 가시는데 일손 좀 거들기 위해 따라갔다. 그때도 이미 추수의 대부분은 콤바인 기계가 하고 사람은 콤바인 기계가 논으로 들어오는 진입구간하고 논두렁 주변의 두어줄 벼만 베어 눕히면 되는 농사였으니 필자 생각에 할만하다고 여겨졌다.
▲ 오종문 목사
 
그런데 웬걸! 논두렁 주위로 벼를 베고 한 50m 나아가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농사! 아무나 못하는 거다. 나이 들면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다고? ! 꿈깨시라! 중노동에 골병이 기다리고 있다.
 
봄에는 이앙기로 모 심고 가을에는 콤바인으로 추수해도 이렇게 힘이 드니 그 옛날 기계가 없던 시절 우리 조상님들은 어떻게 농사지어 먹고 살았을까? 정말 피눈물 나는 고생이었겠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농사 짓는데 있어서 그렇게도 힘든 노동은 오히려 작은 문제였다. 가장 큰 문제는 노동이 아니라 땅이었다. 농사지을 땅!
 
그래서 오늘은 우리나라 역대 토지제도에 대해 글을 써보려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대대로 내려온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를 아시나요? 병작반수제란 무엇인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일제시대까지 이 나라 역사 대대로 내려온 토지제도의 근간이 바로 병작반수제다.
 
병작반수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지주(地主)는 토지를 내고 농민은 노동력을 제공해서 함께 아울러 농사를 짓는다는 뜻에서 아우를 병()’ 자를 써서 병작(竝作)’이라 불렀다.
 
그러면 반수(半收)란 무엇인가? 이렇게 병작을 할 경우에 추수한 후 노동한 농민에게 돌아가는 몫이 수확량의 50%이고 지주에게 나머지 50%가 돌아가는데 지주는 그 땅에 대한 세금으로 수확량의 10%를 나라에 내야 하므로 사실상 지주는 전체 수확량의 40%를 가져간다.
 
시대마다 약간씩 변동이 있긴 하지만 병작반수제의 큰 틀은 대강 이와 같았다. 삼국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이 나라 토지제도 대부분은 이런 병작반수였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 도중에 농민을 보호하는 토지개혁이 일어나기도 했고 때로는 농민을 수탈하는 더 악독한 제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병작반수는 여러 왕조를 통틀어 토지제도의 주류를 이루었다.
 
2. ‘이밥의 기원
 
고려말 권문세족들의 토지수탈이 극심해지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정권을 잡고 1391년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하면서 병작반수금지(禁止)를 선포했다. 당시로서는 정말 대혁명이었다! 예를 들어서 그 내용을 살펴보자.
 
1년 수확량 300()가 나오는 농토에서 노동력을 제공한 농민이 총수확량의 90%270두를 취하고 당시 권문세족인 지주는 수확량의 10%30두만을 취하는데 여기에서 또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한다. 세금은 아주 대폭 인하해서 총수확량의 1/150에 불과하다. 그래서 세금은 겨우 2().
 
그러면 지주 몫은 총수확량의 10%30-세금 2=28. 지주는 1년 생산량 300두 나오는 땅에서 고작 28두만 가져갈 수 있었다. 가난한 농민을 보호하는 제도였다! 사람들은 이씨(李氏)인 이성계가 쌀밥 먹여주었다고 해서 쌀밥을 이밥이라 불렀다는 말이 나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3. ‘만석꾼을 아시나요?
 
그러나 조선으로 접어들어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 권력은 점차 권력자인 양반 지주들 편으로 돌아섰고 병작반수가 공공연히 행해지다가 조선 명종 때 들어서 과전법 대신 녹봉제로 바뀌면서 병작반수가 다시 온 나라에 일반화되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을 포()로 받는 군정(軍政), 정부의 구휼미 제도인 환곡(還穀)을 가리키는 삼정(三政)이 문란해지고 토지 소유에 있어 빈부격차는 날로 악화되면서 여러 지방에 만석꾼들이 생겨났다.
 
만석꾼이란 한 집안에서 소유한 토지에서 매년 쌀 1만석이 나온다는 뜻! 옛날 한 석은 오늘날 약 160kg, 일 만석은 약 1600t! 와우~! 엄청난 규모의 대지주가 만석꾼이다.
 
필자는 보성 오씨(寶城 吳氏)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후에 예수 믿고 목회자가 되어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전남 화순에서 시골목회를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내게 여러 번 자주 물어오는 질문이 있다. 오씨 집안이라면 혹시 오건기(吳建基) 씨네 집안이냐고 묻는다.
 
오건기라는 분은 일제시대 전남 화순과 동복지역의 대지주로서 만석꾼소리를 듣던 사람이다. 물론 나는 오건기 집안과는 친인척이 아니지만 그 분의 명성이 세월이 흘러도 화순 어르신들의 뇌리에 남아있기에 나에게 물어왔던 것이다.
 
조선시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전국에는 만석꾼이란 대지주들이 꽤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 나라에 만석꾼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는 언제부터 어떻게 만석꾼들이 종적을 감추었는지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왜냐? 대한민국 경제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인 병작반수·만석꾼·토지개혁(土地改革) 등에 관한 내용에 대해 국사 교과서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요 역사가라는 자들이 주둥이에 강력 본드칠을 하고 펜을 들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건 또 왜 그럴까?
 
4. 반골(反骨) 이승만!
 
이승만은 1875(고종 12) 황해도 평산에서 양녕대군의 16대 손()으로 태어났다. 2년 뒤 1877년 이승만의 집은 서울로 이사 왔고 이승만은 여느 양반 집안 자제들처럼 서당교육을 받은 뒤 과거를 준비했다.
 
그러나 조선말기 1894년에 갑오경장(甲午更張)’ 또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 부르는 획기적인 개혁정책들이 선포되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내용들을 꼽아보자면.
 
문벌(門閥양반(兩班)과 상인(常人)들의 등급을 없앤다. 공노비(公奴婢)와 사노비(私奴婢)에 관한 법을 일체 폐지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과부의 재가(再嫁)를 허용한다. 등의 여러 개혁 조항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런 조항도 있다. ‘전고국조례(銓考局條例)’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전고국(銓考局)’이라는 정부 부서에서 각 부(아문(衙門)으로부터 선발 추천된 사람들을 시험 보는 일을 맡는다. 이는 역사 대대로 시행되어온 과거 제도를 폐지시키고 새로운 인재 등용 제도를 시행하겠다는 말이다.
 
과거를 준비하던 이승만에게는 출세길이 막힌 셈이었다. 이무렵 서당 친구가 이승만에게 신문물을 가르치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라고 권유하자 이승만은 영어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189542일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은 이승만이 입학하기 10년 전 1885년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세운 중등교육기관이었다.
 
배재학당에 입학해 영어를 배우면서 이승만은 신세계를 알게 되었다.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내용은 영어뿐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정신세계에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이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고,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미국인들의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는 이승만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을 뿌리 채 뒤집어 놓았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유가(儒家)의 윤리를 전부로 알고 살아왔던 이승만에게 군주제(君主制)와 신분제(身分制)의 굴레를 벗어던지라고 가르치는 새로운 사상 정치적 자유20세의 양반가문 청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배재학당 시절 그는 스승 서재필(徐載弼·Philip Jaisohn)을 만났다. 서재필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쿠데타가 실패한 후 일본을 거처 미국으로 망명해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난세의 우여곡절 끝에 서재필은 귀국하여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와 학생들에게 토론을 거처 다수결로 합의를 이끌어 내는 민주주의 방식을 가르쳤다.
 
어명(御命)이 아닌 다수결로 국가 중대사안을 결정한다니. 조선 양반 청년 이승만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는 민주주의 사상들!
 
당시 어마무시한 경제력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들이 조선을 야금야금 먹어들어오는 상황에 어리석은 군주 고종과 민비와 대원군은 무능과 부패와 궁중암투에 휩싸여 있었고 지식인들이 그렇게도 떠받들었던 유가사상(儒家思想)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나라를 구해낼 아무런 대책도 알려주지 못했다. 나라는 점점 망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나마 눈을 뜨고 있었던 배재학당 서재필이 중심이 된 협성회의 토론 주제는 조선의 독립이나 제도개혁과 같은 정치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이승만은 점점 반골(反骨)이 되어가고 있었고 미국인 선교사들과 교사들은 협성회의 정부 비판을 항상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에 협성회 회원들은 미국인 교사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보다 더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18966월부터는 학교 밖에서 독립협회(獨立協會)’로 모이게 되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이승만은 서재필이 주관하는 모임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보의 편집장이 되었다.
 
이승만은 189778일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그날 졸업식장에는 당시 유명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아펜젤러 교장을 포함해 선교사들, 미국 외교관 국내 고위 관료들 포함 60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한 많은 유력한 인사들 앞에서 졸업생 대표로 이승만은 영어로 미국식 연설을 했다. 제목은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었다. 22살의 청년 이승만은 명쾌하고 탁월한 영어로 한국의 독립이라는 엄청난 주제로 연설한 것이다
 
배재학당 졸업 후에는 한글신문인 매일신문·제국신문을 발간하는 언론인이 되었다. 그 신문의 논조가 어떠했을까? 독자들께서 짐작하시는 그대로였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 때문에 부산 앞 바다의 절영도와 진해만을 해군기지로 조차(租借)하려고 했다.
 
그러자 1898310일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힘으로 제정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성토하고 독립을 공고히 하기로 하였다. 독립협회가 개최한 310일의 만민공동회에는 서울 시민 1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운집하여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였다. 이승만은 이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던 인기 연사였다.
 
1898115일 마침내 고종은 독립협회 탄압에 나섰다. 우선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했다. 그리고는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했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共和制)를 도입하려 역적모의를 했다는 혐의였다.
 
이승만은 잠시 선교사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가 곧 밖으로 나와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고 경무청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체포된 독립협회 회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연좌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새웠고, 이승만은 밤을 새워 연설했다. 이승만의 반골기질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승만의 과격 행동으로 집안이 망하게 될 것을 걱정한 그의 아버지는 시위 현장까지 찾아와 그만둘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 박사까지도 찾아와 이승만을 말렸다.
 
다들 말렸다. 그러다가 당신 죽고 당신 집안 망해!
 
결국 이승만은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했다가 다시 붙잡히는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종로 3, 이전에 단성사 자리 옆에 있는 한성감옥에 갇혔다. 동지들 중에는 이미 참형으로 죽은 사람도 나왔다. 한성감옥에서 그는 황국협회로부터 주리를 틀리고 손가락이 뭉그러지고 곤장을 맞는 등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자신의 손가락으로 타자를 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죄목은 고종 퇴위 음모에 가담한 죄! 조선왕조의 입장에서는 역적죄였다.
 
1899711일 그에게는 종신형과 함께 곤장 100대가 선고되었다.
 
그가 가진 자유 민주주의 사상은 그를 그렇게 종신형 죄수로 만들었다.
 
그 어려운 시절 그를 돕는 손길들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그가 고문당하지 않게 자주 면회 왔다. 선교사들이 감옥에 넣어준 영문성경을 이승만은 큰 소리로 읽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을 쓸 수 없어서 감방 동료가 책장을 넘겨주어야 했다.
 
그러다가 그가 회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었다! 조선 양반으로서는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이 나라 역사를 뒤집는 사건이었다! 앞으로 이 나라 조선의 역사가 당시 그가 감방에서 기도한 그대로 훗날에 다 이루어졌으니! 그것이 우연일까?
 
그리고 선교사들이 옥중에 넣어준 세계사 책들을 통해 이승만은 세상 돌아가는 정황을 읽어내고 눈을 떴다!
 
당시 조선 사람들 가운데 세상 돌아가는 방향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을까?
 
선교사들의 거듭되는 탄원으로 감형된 이승만은 57개월의 옥살이를 마치고 190489일 출옥한다.
 
출옥하자마자 이승만은 고종의 밀사가 되어 미국으로 향한다. 나라가 다 망해가게 되자 미국에 도움을 요청할 목적으로 고종은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190411429세의 이승만은 인천항을 떠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이승만과 동지들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워보려 발버둥을 쳤건만 결국 조선은 힘없이 망한다.
 
조선은 망했으나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조지 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프린스턴대학교에서 수학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5. 가난한 농민들의 피눈물을 닦아준 사람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다시 되찾아 1948724일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추진한 농지개혁. 1948124일 농지개혁에 관한 이승만의 연설을 보자.
 
원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적에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거나 부자와 빈민을 인()쳐서 낸 것이 아닙니다. 부자는 대대로 부자요 양반은 대대로 양반으로 지냈으니 이와 같이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일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장하는 민주 정체의 주의는 반상(班常·양반과 상민)이라 귀천이라 하는 등분이 다 없고 모든 인민이 평등 자유로 천연한 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주장을 세우기 위하여 그 근본적 병통을 먼저 교정하여야만 모든 폐단이 차서로 바로잡힐 것이므로 토지개혁법이 유일한 근본적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대통령 이승만은 반상(班常) 혁파와 함께 농지 개혁을 부르짖는다. 농지개혁 없이는 제 아무리 귀천(貴賤) 없는 세상’ ‘반상 철폐를 외쳐봤자 공염불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당시 국회는 이승만의 농지개혁에 극렬히 저항한다.
 
아니? ?
 
그 당시 국회의원에 양반이 많았을까 상놈이 많았을까? 당연히 양반이 많았다. 지주 출신이 많았을까? 소작농 출신이 많았을까? 당연히 지주가 많았다. 그러니 개인의 대토지 소유를 없애고 농사짓는 농민이 농토를 소유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농지법을 세우자는 대통령 이승만의 농지개혁에 지주들이 대부분인 국회의원 나리들이 찬성할 리 없었다. 국회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뻔뻔스런 집단이었다.
 
그러나 농지를 원하는 농민들이 선거권을 쥐고 있는 민주주의 세상이 되었기에 농민들 눈치 보느라 차마 농지개혁을 하지 말자는 주장까지는 못하고 토지대금을 한 푼이라도 더 비싸게 받아보려 안을 제시했다.
 
당시 국회가 제시한 농지대금 기준안은 한 해 수확량의 300%였다.
 
그 의미는 한 해 농사지어서 50%씩 지주에게 바치는 병작반수 6년을 하면 제 7년부터는 농사짓는 농민에게 농토가 돌아간다는 말이다.
 
수 천 년 간 땅 없이 농사지어 지주에게 절반을 바치는 병작반수에 피눈물 흘리며 살아온 농민들입장에서는 그것만 해도 꽤나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국회가 제시한 농지대금을 단번에 절반으로 후려친다! 농지대금은 한 해 수확량의 150%로 정한다!
 
그러면 농사지어서 기존대로 3년 동안 수확량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면 4년 째부터 자신이 농사짓던 농토는 그 농민 소유로 정해진다.
 
부패한 왕조 조선에 저항한 반골 이승만, 한성감옥의 죄수 이승만이 최고 권력자 대통령으로 돌아와 이 땅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땅을 합법적으로 소유케 했다. 이 나라 역사 5000년에 땅에 목마른 농민들의 피눈물을 닦아준 참으로 위대하신 건국대통령이었다.
 
 
그렇게 만석꾼들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국에 가득찼던 소작농들도 사라졌다. 전국 농토의 95.7%가 자작농의 농토가 되었다. 전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토지개혁이었다.
 
그리고 나서 6·25가 터졌다!
 
남자를 아시는가? 내 땅이 있고 마음에 품은 옆 마을 순이가 있으면 그를 지키기 위해 목을 내거는 모자라는 물건이 남자라는 모지리다.
 
만약 농지개혁이 없었더라면 6·25 전쟁 때 국군이 그렇게 목숨 바쳐 싸웠을까? 싸워 조국을 지켜내도 어차피 지주 땅이라면 과연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부모님과 사랑하는 여인과 내 땅이 기다리고 있다! 그 간절한 바람으로 그분들이 피 흘리며 싸워 이 나라가 지금 이렇게 서있다.
 
그 한성감방 죄수 이승만의 기도대로 다 이루어져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
 
농지개혁법안 19503월에 개정되어 공포되었다. 그리고 1950625일 소련 중공 북한이 일으킨 6·25 전쟁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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