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생이 지방 순시를 떠난 후, 며칠이 흘렀다. 남건이 남산을 집으로 불러 정사를 의논하고 있는데, 집안의 사인인 명도(明道)라는 자가 들어와 은밀히 속닥였다. 이 자는 신라에서 파견한 세작에게 매수된 상태였다.
“지금 대막리지가 두 분을 없앨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이번 순시도 그 일을 위해 지방의 군사를 규합하러 간 겁니다.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속절없이 당할 겁니다.”
남건이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소리냐! 형님께서 지방 순시를 떠난 것은 각지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고 백성을 살피기 위함이다. 어디서 감히 요망한 말로 늘어놓느냐!”
명도는 움찔했지만 곱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나리의 안위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정 믿기지 않으시면 왕명으로 그를 불러들여 보십시오. 만약 순순히 돌아온다면 무고한 것이니 소인의 목을 내놓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핑계를 대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는 필시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겁니다.”
남건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인의 말이 그럴듯했다.
이때 남산이 끼어들어 부채질했다.
“저도 그동안 큰형님의 본심을 의심해 왔습니다. 진작부터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언제 해코지를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자의 말대로 해 봅시다. 그럼 모든 게 명확해지겠지요.”
아우의 말을 듣고도 남건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 만약 형님이 눈치라도 채는 날에는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숙부님과 상의해 보도록 하자.”
형제는 말을 타고 연정토의 집으로 달려갔다.
숙부를 만난 남건은 사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연정토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선친이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서로 의심한단 말이냐. 형님께서 이를 아신다면 얼마나 참담해 하시겠느냐.”
남생과 사이가 좋지 않긴 했지만 기왕 후사로 정해졌으니 그를 중심으로 모두가 힘을 모아야 했다. 당과 신라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마당에 나라 안에서 내분이라도 일어나면 큰일이었다.
연정토는 두 조카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남생이 자신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내가 그만큼 얘기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집으로 돌아가서 신중히 생각해 봐라. 어떤 경우에라도 서로 싸워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 연씨 가문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구려의 존망이 달린 일이다.”
형제는 숙부의 충고를 듣고 나서도 남생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명도의 이간질에 넘어간 남건은 날이 밝자마자 대궐로 들어갔다.
보장왕을 알현한 그는 대막리지에 관한 일을 침소봉대하여 무고했다.
“남생이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지방을 돌며 군사를 모으는 중이니 아마도 조만간 반란을 일으킬 겁니다.”
보장왕이 놀라서 물었다.
“지금 남생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대막리지 자리에 있는데 무엇이 부족해 반역을 꾀한단 말이냐?”
남건은 명도가 일러준 대로 말했다.
“국내성에 있는 영양왕의 적손(嫡孫)인 북해왕 광해를 왕위에 올리려 하는 것 같습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왕명을 내려 남생을 불러들여 보십시오. 그가 핑계를 대고 돌아오지 않으면 분명 역심을 품은 겁니다.”
보장왕은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곧바로 남생에게 전교를 내려 도성으로 돌아오라고 명했다.
한편 세작에게 포섭된 승려 신성은 보장왕의 사자에 앞서 국내성에 도착했다. 그는 성주부에 들어서자마자 남생을 찾았다.
대막리지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스님께서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신성은 좌우를 물리친 후 조용히 속삭였다.
“소승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남건과 남산 형제 때문입니다. 이들이 지금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남생이 놀라서 물었다.
“반역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장군을 제거하고 정권을 탈취하려는 속셈입니다. 그들은 국왕 폐하를 속여 대막리지를 귀경하게 한 후 도성에 도착하면 체포할 생각입니다.”
대막리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야기를 듣고 황당했다.
남생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고 계십니까?”
“남건이 폐하께 대막리지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무고했습니다. 폐하는 이를 믿지 않으셨지만 남건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대막리지께 보내는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전령이 도착할 겁니다. 평양으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얘기였다. 승려의 말만 믿고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신성은 남생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절충안을 내놓았다.
“정 믿기 어려우시다면 평양에 사람을 보내 남건의 의중(意中)을 살피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도 감시를 받고 있어서 여기서 오래 지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밤에 다시 평양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승려는 서둘러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다음 날, 신성의 말대로 국왕이 보낸 전령이 오더니 평양으로 돌아오라는 명을 전했다. 이에 남생은 며칠 후에 출발하겠노라고 대답한 후, 그를 돌려보냈다.
남생은 심복을 평양으로 파견하여 남건 형제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간자가 남건의 사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남건은 형이 귀경을 미룬 데다가 간자까지 보내자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분노한 그는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잡아 죽였다.
비보를 접한 남생은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형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조카까지 죽인 아우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남생은 고심 끝에 국내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국내성을 장악한 그는 잇달아 오골성까지 점령했다. 드디어 형제 간의 피를 뿌리는 골육상잔이 시작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보장왕은 막리지 남건을 보내 남생을 진압하게 했다. 남건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단숨에 국내성으로 내달렸다. 남생은 대항할 엄두도 못 내고 오골성으로 달아났다. 뒤를 쫓아온 동생이 성을 포위하자 남생은 싸울 일이 아득했다.
남생은 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어찌해야 할지 방책을 구했다. 한 장수의 입에서 당나라에 투항하자는 말이 튀어나왔다. 남생을 위시한 다른 장수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는 나라를 배신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반대해야 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전멸할 판이었기에 대놓고 성토하지 못했다.
남생은 자존심을 버리고 달아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일단은 신성으로 피신했다가 여차하면 당나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대막리지는 수하들과 함께 오골성을 빠져나와 신성으로 향했다. 가까스로 목적지에 당도했지만 신성 성주가 후환이 두려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남건이 보낸 추격군이 턱밑까지 쫓아오자 남생은 할 수 없이 현도성으로 들어가 농성하는 한편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헌성은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이세적의 부중으로 인도됐다. 이세적은 헌성에게 그간의 경과를 물어본 후 급히 입궐하여 당 고종을 알현했다.
“고구려에서 남생의 아들 헌성이 왔습니다.”
고종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남생이라면 연개소문의 아들이 아니오. 그가 아비의 뒤를 이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로 아들을 보낸 거요?”
“연개소문에게는 남생·남건·남산 세 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권을 놓고 서로 반목하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남생이 지방 순시를 나간 사이 두 아우가 왕을 등에 업고 조정을 장악했다 합니다. 그래서 쫓기는 신세가 된 남생이 지금 현도성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가 동생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갚고자 아들 헌성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연개소문이 죽자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이군.”
“그렇습니다. 그자를 만나 보시겠습니까?”
“물론이오.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는데 어찌 모른 척하겠소.”
고종은 사자를 불러들였다. 헌성이 들어와 예를 마치자 그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그대는 무슨 일로 먼 길을 달려와 짐을 찾는가?”
헌성은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너무 원통해서 폐하께 호소하러 왔습니다.”
그는 숙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내쫓고 정권을 탈취한 얘기를 소상히 털어놓았다. 당 고종은 속으로 연개소문 자식들의 내분을 고소하게 여겼지만 겉으로는 짐짓 위엄을 보이며 나무랐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잘 타일러서 공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선친이 돌아가시고 탈상한 지 얼마나 됐다고 형제끼리 싸운단 말인가.”
헌성은 고종의 설교가 아니꼬웠지만 이곳까지 온 목적을 이뤄야 했기에 꾹꾹 눌러 참았다.
“폐하께서 저들을 몰아내도록 도와주신다면 앞으로 견마지로를 다해 폐하를 섬기겠습니다.”
고종은 남생의 무리가 이미 그물 안에 들어온 고기라 여겼기에 여유를 부렸다.
“짐은 늘 고구려를 취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너희의 내분을 이용하는 것은 떳떳지 못한 일이다.”
그러고는 한참 뜸을 들이던 고종이 헌성을 지그시 보면서 말했다.
“일단 객관에 가서 쉬도록 하라. 짐이 수일 내로 결정하여 알려주겠다.”
헌성은 미덥지 않은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사은하고 물러났다.
고종은 좌우를 물리치고 이세적을 불러 의논했다.
“고구려도 이제 명운이 다한 것 같소. 남생이 투항하겠다니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겠구려.”
이세적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는 고구려를 멸하라는 하늘의 계시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늦기 전에 현도성에 있는 남생을 데려와야 합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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