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독일을 국빈 방문 중이다. 프랑스 대통령으로선 24년 만이다.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가시화된 유럽의 총체적 위기 속에 유럽연합(EU) 쌍두마차의 협력이 한층 중요해졌다. ‘유럽자강론(自强論)’ ‘안보‧경제 홀로서기’가 그의 이번 독일 방문을 관통한 메시지다.
마크롱은 27일(현지시간) 드레스덴 성모교회 광장에서 “자기나라만 생각하거나 미국만 바라보는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며 유럽 공동방위체제 재구축을 호소했다. 이를 “유럽인으로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버금갈 일”이라고 표현한 게 주목된다. 유럽의 안보 홀로서기를 천동성이 지동설로 바뀌는 대변혁에 비유한 것이다. 지난 약 80년 미국에 기대 안주했었음을 말해준다.
이날 마크롱은 “우리가 스스로 국방‧안보 틀을 확립할 때 유럽의 진정한 통일 내지 통합이 완성된다. 이게 향후 몇 년의 과제”라며 “유럽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번 방문이 이뤄졌다”고 짚었다. 이어 우크라전쟁을 “유럽의 주요 난제 중 하나”로 꼽았으나 실은 ‘최대 난제’로 새겨들어야 할 완곡한 어법이다.
그가 “제국주의 욕망에 맞선 프랑스·독일의 동맹 강화”를 강조하자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도 “양국이 힘을 합치면 우크라전쟁·(팔레스타인)가자전쟁·미국대선 등 지정학적 도전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화답했다.
“미국의 적극적인 우크라 지원은 유럽으로서 행운”이지만 “항상 이런 노력을 요구하는 게 합리적인지 자문해봐야 한다”는 마크롱 발언이 특히 주목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종식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대목이다. 15세기 대항해시대 이래 세상을 주도하던 유럽이 20세기 두 차례의 대전을 통해 자멸적 상황에 놓였으며 미국의 개입으로 겨우 수습됐다.
이후 유럽은 미국 원조 아래 부흥했고 탈냉전 들어선 값싼 러시아산 에너지와 중국의 저임금 노동력 덕분에 번영했다. 그런 시대가 끝났다는 자각이 마크롱의 발언에 녹아 있다. 우크라전쟁은 서유럽의 탈냉전 황금기의 종언을 알린 사건이자 EU 자강론의 직접적인 배경이다.
마크롱은 러시아를 향해 “20세기 최악의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제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유럽의 미래를 가지고 노는 권위주의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아울러 “평화는 우크라이나의 항복이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합의한 평화조약으로 이뤄질 수 있다”며 “이게 바로 공동방위‧안보를 구축하려는 이유”라고 말했다.
다만 내달 유럽의회 선거와 관련해 “유럽 전역의 권위주의 바람”을 몰아내자는 마크롱의 주장은 EU 주류와 거리를 둔 헝가리 등을 겨냥한 말이지만, 막거나 제재할 방법이 없으니 공허한 외침에 그칠 수밖에 없다.
유럽의 경제 홀로서기 또한 절실하다. 마크롱은 “유럽이 미국·중국과 경쟁에서 주권적이고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방위산업이든 다른 분야든 우리가 선호하는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유럽식 규칙이 필요하다”고 목소리 높였다.
유럽에서는 시대를 바꿀 만한 창의성이 사라진 지 오래다. ‘미국의 디지털 식민지’라는 지적도 일반적이다. ‘왓츠앱’ ‘페이스북’ ‘아마존’ 등 유럽인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디지털 인프라가 모두 미국 것이다. 최근 출간된 ‘부자 미국 가난한 유럽’(손진석‧홍준기 저)에 잘 소개됐듯 부유하던 유럽 국가들의 현재는 대체로 암울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방위력의 민낯도 만천하에 드러난 상태다.
앞서 오전 마크롱은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찾아 참배했다. 이튿날(28일) 뮌스터에선 ‘베스트팔렌 평화상’이 마크롱에게 수여된다. 유럽통합 기여자에게 주는 상이다.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이 근대 유럽의 기본 골격을 형성한 것에서 유래한 상이기도 하다.
양국 장관들이 함께하는 확대 정상회담도 열린다. 우크라전쟁 장기화에 따른 유럽연합(EU) 재정위기, 중국의 덤핑수출 문제도 논의될 예정이다. 그간 마크롱과 숄츠 사이엔 유럽의 국방 대책을 두고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다. 숄츠가 이웃 프랑스를 놔두고 미국에서 핵심 무기를 조달해 마크롱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핵보유국 프랑스의 방위산업에 기반해 ‘유럽의 국방 자립’을 역설해 온 그를 무시한 처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우크라전쟁 비용은 하루 평균 1억3600만 달러(약 1860억 원)다. 우크라의 재정적자 대부분을 미국과 EU가 대신 메워 준다. 여기에 미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나토 최소 방위비 기준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3%’로 선언한 터라 서유럽 주요국들 시름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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