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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뜻밖의 공작 임무
1987년 10월7일 저녁 8시, 김승일과 김현희는 동북리 초대소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대외정보조사부 최고 간부로부터 공작 임무를 받았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는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여행하면서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이라고 했다. 목적은 88올림픽을 앞두고 ‘남조선 괴뢰의 2개 조선 책동을 막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담당 지도원들과 함께 5일간 동북리 초대소에서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토의했다. 공격 목표는 1987년 11월29일 바그다드발 아부다비 경유 서울행 대한항공-858기였다. 김승일은 “이란·이라크가 전쟁 중이라서 그 지역 공항의 검문검색이 철저하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조사부 최 과장이란 사람이 이를 묵살하고 “김정일 동지의 친필비준에 의한 계획이므로 수정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문구는 KAL 858기 폭파를 김정일이 지시했다는 결정적 단서이다. 이에 대해 조사부 테러 담당 전문가 4인이 한 달간의 연구와 토론 끝에 최종 확정한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1987년 11월12일 김승일·김현희 공작조 평양 출발
△11월14일 모스크바에서 부다페스트로 이동, 부다페스트 아지트에 4박5일간 체류 후 비엔나로 이동, 6박7일 체류
△비엔나에서 비엔나-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 행 항공권 구입. 아부다비-바레인은 위장 루트이고 그들은 별도로 아부다비-암만-로마행 비행기 표를 구입할 것
△11월24일 비엔나에서 베오그라드로 이동 4박5일 체류 중 11월27일 메트로폴리탄 호텔에서 임무 담당 과장과 지도원을 만나 비행기 폭파용 시한폭탄을 인수할 것 △11월28일 베오그라드 출발 바그다드 도착, KAL 858기 탑승 직전에 시한폭탄(트랜지스터라디오)을 정확히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작동시킬 것
△11월28일 23시45분 바그다드에서 KAL 858기 탑승, 시한폭탄을 비행기 선반에 두고 아부다비에서 내릴 것
△11월29일 02:50 아부다비 공항 도착 후 현지 이탈, 바레인으로 가지 말고 11월29일 09:00 이탈리아 항공편으로 로마로 갈 것
△로마 도착 후 2박3일 관광하고 12월1일 11:00 이탈리아 항공편으로 비엔나로 빠져서 즉시 평양으로 돌아올 것
이 계획에 따라 11월10일에는 동북리 초대소에서 격려 및 송별을 위한 파티가 있었고 11월12일 아침 6시30분경 김승일과 김현희는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높은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지켜 싸우겠습니다”는 내용의 충성맹세문을 낭독했다.
김승일과 김현희는 계획대로 그날 오전 8시30분 순안 비행장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죽음의 행진 : 이젠 끝장이다. 여기서 약을 먹자
김승일과 김현희는 작전 계획에 따라 1987년 11월28일 밤 11시10분경 예정대로 바그다드에서 KAL 858기에 탑승해 7B와 7C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머리 위 선반에 쇼핑백에 든 시한폭탄(폭약이 장착된 트랜지스터라디오와 콤포지션 액체 폭약)을 두고 11월29일 새벽 2시44분에 아부다비에 내렸다. KAL 858기는 그날 아침 8시경 버마 남쪽 안다만 공해 상공 약 11km 지점에서 115명의 생명과 함께 폭파되었다.
두 사람은 그날 아침 9시 로마행 비행기를 타려고 통과여객 대합실에 들어갔다. 출구에서 공항 안내원이 항공권과 여권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자 김승일이 당황했다. 탈출용으로 별도로 사 두었던 아부다비-암만-로마행 항공권을 제시할 경우 아부다비가 출발지로 되어 있어 원칙적으로 통과 비자를 받아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가 입국 수속을 취한 뒤에 다시 출국 수속을 거쳐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 것이었다.
평양에서 루트를 연구할 때 아부다비에서는 일본인이 통과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통과여객 대합실로 들어가면서 아부다비까지 오게 된 과정이 명시되지 않은 항공권을 제시하면 분명히 의심을 사게 될 것이라고 믿고 김승일과 김현희는 할 수 없이 바레인행(行) 항공권과 여권을 제시했다. 안내원은 탑승수속을 대신해 주고 바레인행 탑승권을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채로 오전 9시발 바레인행 비행기를 탔다. 아부다비에서 퇴로를 설정하는 작전 계획에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만일 로마로 무사히 빠졌으면 그들을 체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KAL 858기 폭파 사건은 영원히 미스테리로 남아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남한의 조작극으로 치부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KAL 858기 폭파 뉴스를 접한 안기부는 전 세계 조직망에 비상을 걸었다. 그리고 폭파 직전 출발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린 승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두 사람이 나타났고 바레인 입국카드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입국카드에 일본인 두 사람이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신이치’와 ‘마유미’로 기재한 것이다.
안기부는 현지 직원과 대한항공 출장소 직원을 동원하고 일본 정부에 조회해 그들의 여권이 위조여권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고는 바레인 인터내셔널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그들을 북한 공작원이라 단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11월30일 밤 9시에 현지 한국대사관 요원이 호텔을 방문해 신이치(김승일)를 만났다.
12월1일 아침 김승일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태연했다고 한다. 김승일은 공항으로 가기 전에 독약 앰플이 들어 있는 말보로 담배 한 갑을 김현희에게 주면서 혹시 사용해야 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두 사람이 공항에 도착해 로마행 탑승수속을 마치고 출국 신고 카드를 작성, 출국 검색대를 통과하려고 할 때였다. 대기 중이던 일본대사관 직원이 여권과 출국 신고 카드 제시를 요구하며 “당신들은 위조여권 소지자들이니 일본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레인 경찰관 5명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1987년 12월1일 오전 9시, 김승일은 김현희에게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이다. 여기서 약을 먹자”고 했다. 바레인 경찰이 그들을 공안실로 데리고 가 몸수색을 한 후 대합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김승일이 김현희에게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괜찮지만 젊은 마유미 씨에겐 정말 미안하다”는 작별인사를 했다.
이들의 태도가 수상하자 경찰이 가방을 압수할 때 김현희는 재빨리 가방에서 독약 앰플이 들어 있는 말보로 담뱃갑을 꺼낸 뒤 가방을 건네주었다. 지켜보던 다른 경찰관이 “그 담배도 달라”고 했다. 담배를 빼앗으려고 하고 안 빼앗기려고 하는 등 실랑이를 하는 동안 김승일은 독약 앰플을 깨물어 삼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어서 김현희가 담배를 입에 물고 깨무는 순간 ‘아람 핫산’이라는 바레인 경찰관이 재빨리 덮쳤다. 김현희는 앰플 끝부분을 깨물었는데 청산 액체가 기화되면서 기공으로 들어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나 죽지는 못했다. 그때 그 두 사람이 독약을 마시고 죽으려고 고통스럽게 전신경련을 일으키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 그는 그 당시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의 서기관이었던 스나카와 쇼준(砂川昌順)이다. 모든 후속 조치와 양국 간의 협의가 끝나고 1987년 12월15일 김승일의 시체와 자살에 실패한 김현희는 서울로 압송되었다. 정리=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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