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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충되는 2024 노벨 경제학상과 문학상
14일(현지시간) 발표된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세 명이 모두 대한민국을 ‘세계적 성공 사례’로 연구해 온 인물들이라 주목된다. 다론 아제모을루·사이먼 존슨 MIT(매사추세츠 공과대)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교수는 ‘국가들 사이 빈부격차’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킨 학자들이다. 앞서 나온 문학상 선정과의 상충된 가치관·역사관 측면이 향후 화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주요 작품들은 1947년 제주4.3과 1980년 광주5.18을 단순 국가폭력으로 규정한 전제 위에 서 있어 ‘악에 의한 비극적 희생’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그것도 표현·예술의 자유이긴 하나 그녀가 아는 것보다 이들 ‘비극적 역사’의 진상이 매우 복잡다단하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그것들이 진압되지 않았다면 현 대한민국은 상상할 수 없다. 대한민국 성립 자체를 저지하려던 남로당의 도발, 대통령시해 직후의 혼란 속에 대한민국이 해체될 뻔한 국면 등은 그간 한강의 발언이나 작품세계에서 무시돼 왔다.
10일 노벨위원회가 문학상 선정 사유로 한강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을 들었다. 소설가인 부친 한승원처럼 한강 역시 당초 시인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고 일부 클래식 음악인들이 한강 문체의 ‘음악성’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시적 산문” 평가가 공유될 만한 취향일 수 있다. 다만 서로 다른 가치의 충돌로 발생한 “역사적 트라우마”일 경우엔 팩트에 기반한 공정한 조명, 적어도 그럴만한 여지를 둬야 한다.
◇2024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 화두는 ‘대한민국’
스웨덴 왕립과학학림원(KVA)는 아제모을루·존슨·로빈슨의 공로로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며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연구”를 꼽았다. 노벨위원회에선 이들이 “법의 지배가 약하고 착취적 제도를 가진 사회는 성장이나 더 나은 변화를 창출하지 못하는 이유를 밝혔다”고 말한다. 이들 경제학상 수상자의 비교사례이자 연구대상이 대한민국이었다.
튀르키예 태생의 아제모을루(57)는 MIT 최고직인 인스티튜드 교수다. 번영과 빈곤의 역사적 기원,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경제성장·고용·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2005년 40세 미만 경제학자 중 경제 이론 및 지식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2016년 BBVA 지식 프론티어상을 받았다.
존스(61) 교수는 IMF 수석 경제학자 출신으로 MIT 슬론 경영대학원 교수이며 글로벌 경제위기 및 회복이 전문 분야다. 로빈슨(64)은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를 거쳐 시카고대 해리스 공공정책대학원 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각국 정치·경제 체제 등 비교정치를 주로 연구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남한과 북한의 차이에 주목
국가 간 경제발전에 차이를 가져온 정치·경제적 제도 요인을 연구해 온 이들 세 수상자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바람직한 제도에 기반해 이뤄낸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입을 모았다. 2012년 출간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아제모을루와 로빈슨의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가 국내에 번역돼 있다. 2022년 대선 당시 국민의힘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선택할 자유’(밀턴 프리드먼)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과 함께 젊은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으로 꼽기도 했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들의 원인과 배경을 파헤친 이 책에서 저자들은 동시 출발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차이에 주목했다. 국가 흥망의 관건은 지리적·역사적·인종적 조건이 아닌 제도의 문제임을 집중 언급하면서 한반도 사례가 인용된 것이다. ‘포용적인 경제제도를 받아들여 번영을 이룬 대한민국’ ‘개인과 특정 집단만의 이익을 위해 착취적 경제 제도를 도입한 북한’의 차이 분석이다.
아제모을루·존슨 MIT 교수가 이날 대학 측이 마련한 온라인 공동 기자회견에서 ‘한국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 방향’ 관련한 연합뉴스 질의에 답했다. 그에 따르면 “남북한은 제도의 역할을 훌륭하게 보여준 사례” “비슷한 수준이었다가 서로 다른 제도 속에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 격차가 열 배 이상 벌어진 사례”다. 그는 또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매우 어려웠지만 그 이후 성장 속도를 더 높였으며 성장 방식도 더 건강해졌다”고 평가했다.
아제모을루는 2022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주최의 경제발전 경험 공유사업(KSP) 성과 공유 콘퍼런스 당시 평화와 경제적 번영의 근간인 포용적 제도 및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체제와 제도 차이가 경제 격차로 이어졌음을 강조하면서 한반도 위성 촬영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휘황한 불빛과 칠흑 같은 어둠이 대비된 사진이다.
◇연구·지향해야 할 사례로서의 대한민국
존슨은 “한국 사례야말로 우리가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지향하게 만들어야 할 방향으로 생각한다. (발전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문제가 없진 않으나 (비교대상들보다) 훨씬 나은 상태이며 다른 나라들이 이룬 것에 비해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고 평가했다. 배우자가 한국계 미국인이며, 2011년 처남인 제임스 곽(곽유신)과 함께 미국발 경제 위기를 불러온 대형 은행들의 악마성을 폭로한 책 ‘위험한 은행’(Bankers)을 펴낸 바 있다.
로빈슨 역시 “한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경제적 성공담을 이룬 나라 중 하나”라며 “지난 50년간 한국의 성장을 일궈온 모델이 앞으로도 지속 가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 “한국과 북한이 보여준 경제 격차야말로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주요 이슈 중 하나”라며 “소수 엘리트층에만 혜택이 돌아가는 착취적 제도에 장악된 북한에 비해 한국은 포용적 제도를 구축해 폭넓은 기회와 동기부여를 제공함으로써 극적인 사회이동과 혁신을 창출했다”고 평가했다.
또 그는 “삼성·현대 같은 대기업들 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 K팝·K무비 분야에서도 이런 혁신을 본다”며 “이는 한국의 포용적 제도가 허용한 인간의 창의성과 혁신들”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대기업 위주 경제구조가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미국 역시 대기업에 지배되고 있다”며 “자본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델”로 봤다.
한국의 당면 과제로 거론된 고령화·저출산이나 대기업 지배 문제 관련해선 “특별한 대안이 없다. 우리 모두 적응해야 할 문제”라는 입장이다. 사실상 고도산업국가들의 보편적 고민이자 대부분 속수무책이다. 다만 아제모을루가 “급속한 고령화 국가들이 많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참신한 생각 및 기술 개방성이 중요하다” 했고 로빈슨은 대기업 위주 경제구조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미국 역시 대기업에 지배되고 있다”며 이를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봤다.
세 학자의 대(對)북한 진단 또한 비슷하다. 아제모을루는 “북한에 대해 큰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며 “고착화된 닫힌 시스템”의 치명적 약점을 짚었다. 존슨은 북한의 핵무기·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을 “극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표현했고 “좋은 제도가 포용적인 성장을 가져와 더 많은 사람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해서 모든 국가의 지배층이 늘 그런 제도를 허용하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점도 세 학자가 일치한다. 로빈슨은 “현대국가의 포용적 경제와 맞지 않는 정치 체제” 내지 “전체주의적 독재 정치체제 탓에 자발적 변화를 기대하기 매우 어려워 보인다”고 각각 중국과 북한을 평가하며 북한 주민들이 오랜 기간 고통을 강요당하면서 핵무기가 만들어진 것을 꼬집었다. “극도로 위험한 일”이며 “리더십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국가간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례에 주목하게 됐고 ‘지한파’로 통하게 됐다. 모두 미국에서 활동 중이면서 ‘이주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제모을루는 1967년 9월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런던 정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30대였던 2005년 존 베이크 클라크 메달 수상 이래 학계의 스타다. 이 상은 미 경제학계에서 ‘예비 노벨 경제학상’으로 불릴 만큼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했다.
1960년 영국 출신인 로빈슨은 런던 정경대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교수를 거쳐 시카고대 해리스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공동수상자인 존슨 교수는 1963년 영국 태생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경제학자와 미국 싱크탱크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아제모을루와 존슨은 공저 ‘권력과 진보’로도 유명하다. 기술 진보에 따른 부가 소수에 편중되는 위험성, 산업혁명과 AI가 인류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지에 대해 고찰한 책이다. AI의 생산성 향상이 과대 포장된 점, AI에게 빼앗길 일자리를 5% 정도로 진단하며 미국 일자리 30~70%를 AI가 대체할 것이라는 기존 시각을 반박한다. 챗GPT 등이 가까운 미래에 인간을 대체할 가능성도 높게 보지 않았다. 또한 대기업의 연구개발 투자로 인한 기술 진보가 “대중의 복리후생을 희생해 독점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의 공존”에도 주목한다.
◇역사적 트라우마의 ‘허구적 재구성’인 문학, 수십년 성공 역사를 ‘사실’로 직시한 사회과학적 연구의 차이
한편 사회학자 류석춘 연세대 정년교수는 본지에 “노벨 문학상 수상이 준 불편함을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가 해소해 준다”며 소감을 전해 왔다. 비슷한 조건 아래 출발해 전혀 다른 오늘날을 맞은 나라들의 차이를 집중 고찰한 발전사회학 전공자인 류 전 교수는 “독자들이 비로소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정통 사회과학의 분석 결과로 한국 발전을 이해할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역사적 트라우마를 ‘허구’로 재구성한 문학보다 수십년 역사의 성공을 ‘사실’로 직시한 경제학상 선정에 박수를 보낸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류 교수는 ‘포용적 제도’ 수립 없이 독재를 추구한 일부 국가의 경우 “착취적 제도와 낮은 경제성장의 덫에 갇힐 뿐”이라는 수상자들의 의견을 공유하며 “이승만·박정희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해 그들이 중장기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포용적 제도’를 구축·실천했다”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 비민주적 수단이 동원되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중산층이 확대돼 포용적 제도가 안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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