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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달려 북부간선도로로 해서 늦가을의 양평에 갔다. 두물머리 양수리의 양평역에서 합세하니 도합 네 사람, 우리는 시인이 출판사를 하는 산골짜기를 찾아간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 백석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노래한 구절이었다.
그러나 시인이 세상을 ‘버린’ 것은 세상과 싸운다거나 등진다거나 해서가 아니요, 아픈 아내를 돌볼 수 있는 ‘복지’를 찾아간 것이었다. 옥천면 근처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하나로마트에 들렀다 작은 내를 따라 거슬러 올라 산골짜기 바로 밑 하얀 집에 다다랐다.
시인이 전세를 들어 자리 잡은 너른 집 마당에는 가을배추가 스무 포기가량 가지런히 섰다. 늦은 오후 햇살을 등지고 선 아름드리 단풍나무 이파리들은 만추의 화사한 빛깔을 뿜어내고 있다.
시인의 거실은 작업실이다. 긴 탁자 한쪽에 컴퓨터 모니터는 어젯밤도 눈 아프게 일했을 시인의 노동을 가늠하게 한다. 그 건너로 클래식 LP판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러고 보니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이 실내에는 선율이 흘렀다.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B단조 작품번호 104’의 디스크 자켓이 눈에 들어온다.
이 시인의 서가에서 나는 보물 같은 책들과 맞닥뜨린다. 당장 김향안(=변동림)의 산문집 ‘파리(1962)’는 내가 만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판본이다. 시인의 허락을 받고 비닐 커버를 조심스레 벗겨내고 책장이 갈라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떠받들어 본다. 내가 변동림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수필가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시인은 아쉽게도 노천명의 ‘산딸기(1948)’가 먼저 있었노라고 한다. 그의 서가에는 이 책마저 옛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수주 변영로의 ‘명정 사십 년(1953)’에, 김용준의 ‘근원수필(1948)’에, 이태준의 ‘무서록(1941)’까지, 시인은 참으로 옛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시인은 또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서가에 그에 관한 일본 쪽 평전들을, 그리고 그의 소설들도 몇 무더기 쌓아놓고 있었다. ‘인간실격(1948)’을 읽을 때만 해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는데, 결국 다자이 오사무는 그 자신과 너무나 흡사해 보였다고 한다.
쓸쓸했다. 매일 책을 교정하고 편집하고 디자인하는 노동과 아픈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시인은 힘겨운 생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다자이 오사무 평전을 자기 식대로 써보겠노라 했다.
시인의 아름다운 집을 뒤로 하고 거의 한 시간을 꼬불꼬불 국도를 달려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바야흐로 석양빛을 받고 선 웅장한 은행나무를 우러러본다.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말이다. 싸우려 해서는 절대로 깊이 내려가 다다를 수 없는 삶의 심연을 생각한다. 눈부신 노란 빛의 향연에 찔리운 상처받은 가슴으로 서울로 돌아선다.
예술은 운명이 낳는 것이며, 그 외에 어떤 것도 어떤 이의 예술을 단련시킬 수 없다. 나는 이미 운명에 패배해 버렸다. 싸움의 심성을 벗지 못한 이에게 예술은 너무 멀리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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