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가 남긴 것이 재산이 아니라 빚일 때, 상속인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상속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한정승인을 통해 빚을 상속재산 범위 안에서만 책임지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정승인을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오해하지만, 세금 문제는 별개의 영역이다. 상속 채무는 막을 수 있어도 국세청은 피상속인이 생전에 이전한 재산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사전증여로 판단되면 증여세가 부과된다. 한정승인은 빚에 대한 보호막일 뿐 세금 면제의 근거가 아니다.
사례를 보자. D씨의 아버지는 사망 직전까지 사업 부채에 시달렸다. 남겨진 재산이라고는 헐값의 토지 한 필지뿐. D씨는 당연히 한정승인을 선택했다. 그런데 세무조사에서 아버지가 수년 전부터 D씨 계좌로 500만~2000만 원씩 반복적으로 송금한 사실이 확인됐다. D씨는 “사업이 어려워져 생활비를 지원받은 것이고 이미 모두 사용했다”고 해명했지만 생활비 지출 증빙은 거의 없었다. 결국 국세청은 해당 금액을 사전증여로 판정하고상속과 별개로 증여세를 부과했다. 한정승인을 했더라도 세금은 피하지 못한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직계존비속 간 증여는 상속개시일 이전 10년 이내 거래를 상속세와 합산해 과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준 돈이 실제 생계 목적이었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하면 사실상 대부분 증여로 간주된다. “가족끼리 주고받은 돈”이라는 말 한 마디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계좌 기록, 사용처 자료, 영수증 등이 없다면 설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또한 부모가 이미 채무 상태였거나 채권자의 압박을 받고 있던 시점의 송금이라면 채권자 회피 의도가 의심되어 ‘사해행위’로 판단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모든 지원이 곧바로 과세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비, 치료비, 기본 생계비 등은 통상적으로 비과세다. 그러나 기준이 모호하고 금액이 크거나 사용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면 언제든 문제로 비화한다. 특히 부모의 재정 상황이 악화될수록 국세청은 송금 내역의 성격을 더 엄격하게 판단한다. 이미 사용해버린 돈이라고 해도 그것이 무엇에 쓰였는지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증여세는 ‘남아 있는 돈’이 아니라 ‘이전된 돈’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속 신고 과정에서는 상속재산보다 사전증여 재산이 더 크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사업 실패를 우려해 자녀 명의로 부동산을 미리 이전하거나 부모 계좌에서 자녀 명의 적금으로 꾸준히 돈을 넣어둔 기록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경우 상속인은 “부모를 도와준 것뿐”이라 생각하지만 세법은 그 반대로 해석한다. 즉, “자녀에게 재산을 이전한 것”으로 본다.
상속 과정에서 가장 우려해야 할 변수는 자금 이동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다. 송금의 목적을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면 국세청은 이를 생활비가 아닌 증여로 판단할 수 있다. 모호함은 세무 리스크를 키우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