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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리와 고물가에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채무를 조정해주는 ‘새출발기금’이 출범 전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금융권과 지자체는 빚 탕감 정책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고 성실한 상환자에게 박탈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사실상 강한 반대에 나섰다. 또한 부실 차주의 범위가 너무 넓고 최대 90%에 달하는 채무감면율로 재정적 손실이 금융권과 지자체로 떠넘겨질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하반기 ‘125조원+α’ 규모의 금융 민생안정 대책을 신속하게 추진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빚 탕감 논란에 대해서도 채무조정은 전체 중 3%에 해당하는 취약 차주에 한해 적용되는 것이라며 코로나19 사태로 빚을 낸 이들의 경우 다시 출발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줘야 된다는 입장이다.
원금 최대 90% 탕감... ‘도덕적 해이’ 논란
내달 말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만기 연장’ ‘원금·이자 상환 유예’ 금융지원 조치가 종료될 예정이다. 이에 정부는 지난달 14일 대통령 주재 제2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소상공인에 대한 80조원 규모의 금융지원 방안 중 하나로 새출발기금을 발표했다.
새출발기금은 빚 상환이 어려운 25만명 규모의 자영업자·소상공인의 채무를 매입하는 프로그램이다. 금융사가 보유한 부실 또는 부실이 우려되는 채권을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사들여 빚을 조정해주는 일종의 ‘배드뱅크’다. 연체 90일 이상의 부실 차주에 대해 60~90%까지 원금을 감면하는 것이 골자다. 윤석열표 배드뱅크로서 부실·부실우려채권 매입에 무려 30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새출발기금은 지난 20여년간 조성된 배드뱅크 가운데서도 가장 큰(최대 90%) 감면율을 보인다. 과거 배드뱅크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노무현 정부 2004년 ‘한마음금융(카드사태 위기)’ 2005년 ‘희망모아’ △이명박 정부 2008년 ‘신용회복기금(가계부채 위기)’ △박근혜 정부 2013년 ‘국민행복기금(금융위기 후조치)’이 원금의 최대 50%를 감면해줬다.
이처럼 과거 정부도 각종 금융위기 때 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응했는데 그때마다 시장질서 교란과 금융회사에 부실 떠넘기기 논란과 비판이 단골 메뉴처럼 등장했다. 새출발기금 역시 본격적인 출범 전에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세밀한 정책 설계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권은 금융당국의 ‘소상공인·자영업자 새출발기금 채무조정 실행 계획안’이 과도하게 원금을 감면한다고 비판했다. 은행권은 캠코 매각 채권에 대한 원금감면 비율을 60∼90%로 설정할 경우 도덕적 해이가 발생해 부실 차주가 급증할 우려가 높다고 주장했다. 최대 90%에 이르는 원금 감면 비율을 10∼50% 정도로 하향 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출 보증 선 지역 신보, 손실 떠안을 수도
이번 정책으로 손실을 부담해야 하는 서울시 등 17곳의 지방자치단체들은 금융권과 마찬가지로 일제히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코로나 피해 소상공인 등이 대출을 받을 때 지자체 산하 지역 신용보증재단(지역 신보)이 보증을 섰는데 이번에 조성된 새출발기금이 이들의 부실채권을 헐값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손실을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신보는 지자체 등의 출연금으로 운영 중인데 코로나19 당시 은행 대출을 받는 소상공인을 위해 보증을 섰다. 중앙정부가 재정 부담과 정책 손실을 자신들에게 전가하는 것 아니냐며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국 지역 신보의 보증 잔액은 2019년 말 23조원에서 올해 6월 45조5000억원으로 무려 2배 가까이 급증한 상태다.
서울시 산하의 서울신보는 연간 부실률을 10%로 가정하고 구상채권 매입가율 12% 가정 시 매년 손실액이 4000억원에 이른다는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전국 17개 광역시장과 도지사로 구성된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측은 “새출발기금 사업은 지방 재정에 직접 손실을 발생시킬 수 있는데도 지자체 입장은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며 “새출발기금 지원 대상과 범위를 축소하고 지자체 재정에 손실이 발생할 경우 국비로 보전해달라”고 입장을 밝혔다.
금융위원회(금융위)는 금융권과 지자체의 반발에 대해 “채무조정 프로그램 및 새출발기금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발생한 잘못된 지적”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새출발기금의 기본 구조와 채무조정 원칙은 신용회복위원회의 워크아웃, 법원의 개인회생 등 현행 채무조정 프로그램과 동일하다고 밝혔다.
현행 채무조정 프로그램의 원금감면 한도는 신용회복위원회의 경우 0~70%이며, 법원의 개인회생은 별도 제한이 없다. 평균 감면율 역시 신용회복위원회는 44~61%, 법원 개인회생은 60~66%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번 채무조정은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 이뤄지며, 소득·재산이 있는 차주는 원금감면을 받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빚보다 재산 많으면 ‘채무조정’ 없다”
새출발기금은 상환능력을 상실해 90일 이상 장기연체를 겪고 있는 금융채무불이행자에 해당하는 차주가 보유한 신용채무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담보가 있는 채무는 원금을 감면하지 않는다. 또한 새출발기금 이용자는 금융채무불이행자 등록으로 신규 대출, 신용카드 이용 등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원금감면 수준에 따라 살펴보면 60~80% 수준의 원금감면은 해당 차주가 보유한 재산을 넘어선 부채분에 한해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원금감면율 90%의 경우에는 △기초생활수급자 △중증장애인 △만 70세 이상의 고령자 등 원금상환여력이 없는 취약계층에 한해 적용된다.
금융위 관계자는 “채무조정을 받은 차주는 7년의 장기간 정상금융거래를 할 수 없음을 고려할 때, 상환능력이 있는 차주가 원금감면을 받기 위해 고의적인 연체로 금융채무불이행자가 되고자 할 유인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김주현 금융위원장 역시 이러한 잡음에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정책금융기관장 간담회에서 김 위원장은 “고금리·고물가 등 경제 여건 악화로 취약차주의 어려움이 가중되지 않도록 125조원 규모의 금융 부문 민생 안정 과제를 차질 없이 이행해달라”고 요청했다.
금융위는 도덕적 해이 논란에 대응해 정책 홍보를 강화하기로 했다. 김 위원장은 “수요자 편의성을 높이고, (해당 정책을) 몰라서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홍보를 강화해달라”고 주문했고, 기관장들은 “정책 홍보를 강화해 제도 내용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상세하게 설명하겠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일 대통령 업무보고 관련 브리핑에서 새출발기금과 관련해 “금융권, 보증기관, 중소벤처기업부, 지자체 등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며 “논의 과정을 통해 제도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면 여러 가지 오해에 대한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금융당국은 이달 중 새출발기금의 세부 운영방안을 마련한 뒤 8~9월 관련법 시행령 개정과 전산 구축을 마친 뒤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10월부터 제도를 추진할 예정이다.
한편, 금융위는 18일 예정이던 새출발기금 운영방향 발표를 연기했다. 대신 반발 중인 금융권의 이해를 위한 추가 소통을 선택했다. 이날 예정대로 열린 설명회에서는 기존의 감면 비율 최대 90%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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