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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와 글로벌 인플레이션 및 고금리 시국을 맞으면서 물가가 계속 치솟고 있는 가운데 유독 쌀값만 연일 폭락하자 쌀값 하락이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농사에 필요한 자재와 비료, 농약뿐만 아니라 인건비도 모두 올랐건만 쌀값만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쌀 수확 이후 올 9월까지 1년 새 25%나 떨어졌다. 이에 일부 농민들은 추수를 앞둔 벼를 갈아엎으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기도 했다.
여야 정치권도 정부의 쌀 매입을 의무화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두고 대치했다. 결국 쌀 수요를 초과한 물량에 대해 해마다 시장격리를 의무화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지난달 19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위원장 소병훈) 전체회의에서 야당에 의해 단독 처리됐다.
농업계는 쌀문제가 정치권의 관심을 받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실속 없는 정치공방으로 끝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45년 만에 폭락… 재고량 쌓이고 소비는 ‘뚝’
전국 벼 재배 농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풍년이지만 근심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비료와 연료 등 원자재 값이 다 올랐으나 쌀값은 오히려 하락해 벼 농사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쌀 농가들은 수확을 앞둔 논을 갈아엎으며 정부에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충남도연맹 관계자들은 9월21일 예산, 당진, 보령, 부여, 서천, 아산, 논산, 천안, 청양 등 9개 시·군에서 ‘논 갈아엎기 투쟁’을 펼쳤다.
농민회 회원들은 ‘양곡관리법 개정’과 ‘쌀값 보장을 위한 시장격리’ 등의 팻말을 들고 “비료와 연료 등 농업경영 비용은 폭등하는데, 농민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는 갈수록 떨어져만 간다”며 수확을 20여일 앞둔 고개 숙인 벼를 트랙터로 갈아엎었다. 이들은 현재 밥 한 공기에 농민에게 돌아가는 원가는 206원에 불과한데, 최소 300원 이상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회 관계자는 “필지 당 몇 십만 원이라도 건져야 희망이 있는데, 현재 이 쌀값으론 남는 게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러니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손해라는 말이 나온다”며 “논 한마지기(200평)당 대략 16만 원 정도 적자를 본다”고 말했다.
산지 쌀값은 9월15일 기준 20㎏에 4만725원으로 전년보다 1만3503원(24.9%) 하락했다. 전년 대비 하락률은 통계청이 관련 통계를 내놓은 1977년 이후 45년 만에 가장 컸다.
쌀값이 추락하는 이유는 쌀 생산량은 크게 증가했지만 국내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백미 생산량은 388만1601t으로 전년 대비 10.7%(37만5022t) 늘었다. 2016년 이후 5년 동안 내리 감소하다가 지난해 증가로 돌아섰다. 반대로 1인당 쌀 소비량은 매년 꾸준히 감소했다. 재배면적이 2012년 1인당 쌀 소비량은 69.8㎏에서 지난해 56.9㎏으로 줄었다.
이에 대응하고자 정부가 나서서 쌀을 사들이고 쌀 소비를 늘리기 위한 캠페인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쌀값 폭락세를 멈추기에는 역부족인 모습이다.
올해 쌀 생산량은 380만4000t으로 전망됐다. 통계청이 지난달 7일 발표한 ‘2022년 쌀 예상 생산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쌀 생산량은 지난해 388만2000t에서 올해 380만4000t으로 2% 줄어들었다.
이는 가뭄과 다른 작물 재배 지원 등 정부 정책으로 벼 재배면적이 소폭 감소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올해 벼 재배면적은 72만7158헥타르(ha·1만㎡)로 지난해 73만2477ha보다 0.7%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 쌀 생산량을 살펴보면 △전남이 74만t으로 가장 많고 △충남 73만5000t △전북 61만9000t △경북 52만7000t 순이었다.
과잉 생산으로 쌀값 폭락 사태를 불러온 지난해보다 쌀 생산량이 2% 줄어들었지만, 올해도 수요량 대비 여전히 20만여t이 남아도는 상황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올해 385만t이 생산돼, 초과생산량이 24만8000t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이에 정부는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지난달 20일부터 쌀 45만t을 수매해 시장에서 격리키로 했다.
농식품부는 지난달 20일부터 2021년산 쌀 10만t과 2022년산 쌀 35만t을 수매해 총 45만t을 연내 시장에서 격리한다고 밝혔다. 2021년산 구곡이 쌀값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올해 나오는 신곡도 함께 사들인다는 계획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지난해 수확한 구곡의 유찰 물량이 발생할 경우 그만큼을 신곡 매입물량에 포함시켜 연말까지 총 45만t을 시장격리 하겠다”고 말했다.
여야, 쌀 의무매입 놓고 대립 격화
이런 가운데 국회에서는 쌀 시장격리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가 대립 중이다.
올해 쌀값이 전년 대비 20% 넘게 폭락하며 농심이 심상치 않자 민주당은 초과 생산된 쌀 강제 매입 조항을 넣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7대 핵심 추진과제’로 선정해 입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현재 정부는 쌀이 수요량의 3% 이상 초과 생산되거나 수확기 가격이 지난해보다 5% 이상 하락할 경우 쌀을 사들이게 돼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강제 조항이 아니다.
현행 양곡관리법 ‘양곡수급안정대책 수립·시행 등에 관한 규정’을 보면 △초과생산량이 생산량의 3% 이상일 때 △쌀 가격이 평년 가격보다 5% 이상 하락했을 때 정부는 공공비축미를 매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야당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과잉 생산된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하게 하면 시장에서의 조정 기능이 상실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시장격리 의무화는 현재도 구조적 공급과잉에 직면하고 있는 쌀 산업뿐만 아니라 미래 농업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정부는 가루쌀·밀·콩과 같은 전략 작물 생산 확대를 통해 식량안보 강화를 추진할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단기적 수급 불안이 발생하면, 올해와 같이 선제적이고 과감한 수급 안정 대책을 통해 쌀값을 안정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쌀 과잉 생산에 따른 농가의 손실을 보전해줘야 한다는 방향에 대해선 공감하면서도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 매입해 판로가 보장되면 과잉 생산이 유도될 수 있고 이로 인해 재정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 법 개정에는 반대했다.
국민의힘 간사인 이양수 의원은 “쌀 시장격리 의무화는 쌀 산업을 망치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국감 이후 공청회 등을 거쳐 의견수렴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날치기로 진행하고 있다”며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재정 부담이 가중되고 미래농업 투자 감소 등 경쟁력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보고서에 따르면 쌀 시장격리를 의무화하면 2030년까지 연평균 46만8000t의 쌀이 과잉 생산되고, 수매에 드는 정부 예산이 연평균 1조443억 원이 소요된다고 예측했다.
정부는 쌀값 하락의 원인을 구조적인 공급과잉에서 찾고 있다. 국민의 쌀 소비량은 급격하게 줄어드는 반면 농민은 이와 무관하게 쌀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10년(2011∼2021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71.2㎏에서 56.9㎏으로 20.1% 감소했지만, 같은 기간 벼 재배면적은 85만4000㏊에서 73만2000㏊로 14.3% 줄어드는 데 그쳤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쌀값 하락을 근시안적으로 처리할 게 아니라 식량 주권과 식량 안보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2020년 기준 곡물 자급률이 20.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최하위 수준(32위)에 머물러 있다. 곡물 자급률은 쌀, 밀, 옥수수, 콩과 같은 각종 곡물의 국내 소비량 중 국내 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반면 프랑스·캐나다·미국·독일 등은 자급률이 100%가 넘는다. 2020년 한국의 쌀 자급률은 92.8%로 2018년 이후 100% 아래로 떨어졌고 콩(7.5%), 밀(0.5%), 옥수수(0.7%)는 턱없이 낮다.
양옥희 국민과함께하는농민의길 상임대표은 “식량이 핵보다 무서운 무기가 되고 있다”며 “한국은 OECD 국가 중 식량자급률이 낮은데도 수입을 거듭해왔고 그 결과 곡물자급률이 20%선조차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정치권 논의가 말잔치로 끝나선 안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쌀 농가에서 바라는 건 문제 제기가 아니라 문제 해결이기 때문이다.
서용석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사무총장은 “쌀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은 결국 돈 문제로 귀결된다”며 “여당끼리, 야당끼리 목소리만 내는 데 그쳐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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