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문의 영화세상] 원로가 아니라 ‘쓸모 있는 바보’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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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7-06 06:31:10

존경받는 원로는 나이만 많다고 저절로, 당연히 되는 게 아니다. 필요할 때 할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조직위원장을 역임한 김동호 씨는 영화계를 대표하는 원로로 꼽힌다.

박근혜 대통령 재임 때는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았으니 ‘김동호 위원장’이란 호칭은 영화계를 뛰어넘어 문화계에서도 통하는 호칭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그가 왜 문화계를 대표하는 원로로 꼽히는지 의아할 뿐이다.

5·16 직후 공보부 7급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문화공보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났다. 하급 공무원에서 문화공보부 차관까지 오른 그에게 ‘관운’이 좋다는 평가가 따랐다. 맡은 일을 분명하게 하면서 대인관계도 무난했다는 방증일 터이다. 그 후 초대 예술의전당 사장·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영화진흥공사(영진공) 사장을 역임했다.

그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신생 영화제의 간판 노릇을 한 것은 뜻밖의 행보였다. 당시 문성근·명계남 배우, 정지영 감독, 고 이춘연 시네2000 영화사 대표, 이은 명필름 대표, 이용관 경성대 교수 등이 참여하는 영화인회의는 영화제의 간판으로 그를 추대했다. 좌파 패거리들의 입장에서 그는 영화계의 이완용이나 마찬가지였다. 영화 행정을 총괄하는 문공부 관료출신인데다 통제와 검열의 본산이라며 해체를 주장했던 공연윤리위원회와 영진공 사장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을 좌파 세력이 주도하는 부산영화제의 간판이랄 수 있는 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한 것은 의외였다. 지금도 이 대목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아마도 김동호 씨를 전면에 내세우면 전략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는 좌파의 필요와 좌우를 떠나 범영화계의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김동호 씨의 개인적 욕심이 적당히 어울린 결과로 보인다.

어쨌거나 부산영화제는 출발했고 주최자들도 놀랄 정도로 외형적 성장을 거듭했다. 당시 도쿄(東京)영화제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주목받았지만 10회쯤을 넘어가면서는 부산영화제가 더 북적거렸다. 부산영화제의 최대 공로는 폭탄주의 세계화라는 우스갯소리가 이 무렵에 나왔다. 해운대의 포장마차나 카페·술집 등 한국영화인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술을 섞어 밤새워 마시는 풍경이 일상처럼 이어졌고, 처음에는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치던 외국인들도 차츰 폭탄주 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부산영화제를 다시 찾은 외국 인사 중에는 밤새 술 마시며 영화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때가 그리웠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폭탄주는 부산영화제를 상징하는 명물이 됐다.

김동호 씨를 부산영화제를 발전시키고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린 공로자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자체와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는 부산영화제가 과연 제 역할을 했는지, 그동안 발전했다는 한국영화가 우리 사회에서 무슨 기능을 했는지를 돌아보면 머릿속이 아득해질 뿐이다.

부산영화제는 사실상 좌파영화인들의 진지 역할을 했다. 겉으로는 문화예술의 가면을 썼지만 영화제를 통해 집단끼리의 경력을 쌓고 실적을 만들어 다른 영화제의 핵심요원으로 들어가거나 전국에 미디어센터나 영상위원회를 만들어 기반을 넓혔다. 198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부정하고 전복하면서 좌파 이념을 확산시키는 데 앞장섰다. 세월호 침몰과 관련 황당한 주장을 편 ‘다이빙벨’이나 ‘대통령의 7시간’, 천안함 폭침을 허위라고 주장하는 ‘천안함프로젝트’, 간첩 송두율을 옹호하고 추종하는 ‘경계도시2’, 제주 강정해군기지 건설을 비난하는 ‘잼다큐 강정’, 성주의 사드기지 건설 반대를 선동하는 ‘소성리’ 같은 영화들을 끊임없이 상영하고, 참가 영화인들이 일방적인 주장을 담은 선동이나 다름없는 퍼포먼스를 벌여도 김 위원장은 모른 척했다.

그는 부산영화제가 정치적 현안에 관한 주장을 내거나 어떤 논란이 나와도 한마디도 없었다. 기회주의적인 보신의 전형이었고. 좌파에게는 얼굴은 있되 말은 없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였다. 돌아보면 그가 한 일은 대우받는 명사로 여러 영화제를 오가고, 시간이 나면 영화 만들기 등으로 개인적인 경력을 쌓은 것뿐이다. 부산영화제를 떠난 뒤 강릉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은 것도 실망이고, 그나마 올해는 예산이 없어지는 바람에 영화제가 중단되었는데도 아직도 직함을 그대로 쓰고 있는 대목에서는 더욱 아연실색이다. 영화계가 길을 잘못 가고 있다면 나아갈 바를 제시해 주는 게 원로의 역할일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한다면 원로가 아니라 나이든 노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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