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칼럼] 50년대엔 은성, 60년대엔 대머리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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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그 시절 술고래 기자들의 풍속사
값싼 외상 술집에 펼친 그들의 낭만과 객기

조우석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12 06:31:10

세상이 바뀐 지 오래다. 역사학의 경우 오래전 풍속사·미시사 바람이 불었다. 연대기를 좔좔 외우고 왕후장상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못지않게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내겐 ‘말 공장’ 신문업계의 예전 모습, 특히 그 공간의 주인공인 기자 집단의 삶과 일상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건 야사·정사의 구분을 뛰어넘어 당시 사회사의 한 단면이었다.

우선 문인들의 경우 그걸 보여 주는 전설의 책이 있다. 일제시대 술 마시던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수주 변영로의 ‘명정(酩酊) 40년’. 하지만 이건 너무 옛날 얘기다. 명동 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이봉구가 쓴 ‘명동 야화’, 기자 출신 남재희의 ‘언론 정치 풍속사-문주(文酒) 40년’ 등도 뺄 수 없다. 그중 남재희의 기록엔 풍류가 있고, 박정희 등 역대 대통령까지 줄줄 등장해 읽는 재미로 치자면 으뜸이다.

하지만 때론 불편하다. 올해 90세인 이 철부지 노인의 성향이 너무도 좌편향 일색인 데다가 때론 폭력적이다. 1987년 국회 국방위 회식 사건이 대표적이다. 박희도 육군참모 총장을 비롯한 장성 8명과 남재희를 포함한 여야 의원 10명이 술을 마시다가 일이 벌어진 그 악명 높은 술자리 말이다. 당시 남재희가 벽에 폭탄주 잔을 집어던지자 장성 하나가 남재희의 턱에 발길질을 가해 왔다.

너무 살벌하지 않은가? 그와 또 다른 분위기가 보름 전 소개했던 편집기자 권도홍이 전하는 1960년대 기자 사회 술판 얘기로, 이건 상대적으로 구수하다. 그가 남긴 책 ‘날씨 좋던 날에 불던 바람’(나남출판, 2010)에 실린 일화 중에도 무협지 뺨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단 권력·정치가 끼어들지 않으니 좋다. 권도홍의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당시 분출할 수 없었던 기자 사회의 몸부림 혹은 허세 같은 것이다.

한번은 나름 술고래를 자처하는 권도홍이 술자리에서 헤비급 동료와 맞붙었다. 동아일보 지방부 차장 김동홍이 상대였다. 김동홍은 100㎏ 거구에 독종으로 유명했다. 그는 1950년대의 권력 실세 중의 한 명이던 치안국장 김종원과 술자리 시비 끝에 그의 낭심을 쥐고 흔드는 바람에 김종원이 끝내 “사람 살려”라고 외치며 항복을 선언했다는 일화도 남겼다.

그런 김동홍을 정말 거짓말처럼 권도홍이 급소 단 한 방 가격으로 제압해 버렸단다. 그런 다음 유유히 제 자리로 돌아와 한 잔 들이키려는 찰라 어느 새 돌아온 그가 권도홍의 머리통을 맥주병으로 후려쳤다. 시비는 그걸로 끝. 권도홍은 붕대를 머리에 칭칭 감은 채 다음 날 정시 출근했다. 편집국장 천관우를 바라보니 그도 ‘야간 전투’ 흔적이 역력했다. 이마와 콧잔등에 빨간약을 바른 채 먼 산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그날 오후 넌지시 물어보니 “집에 가는데 담벼락이 와서 날 들이받데?”하고 넘겼다. 참고로 천관우는 ‘무제한급 고래’의 주당. 그는 근무 중 30도 넘는 댓병 소주를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셔댔으며, 천일염 굵은 소금을 입에 털어 넣는 게 안주의 전부였다. 그런 술고래들의 유명했던 집결지가 광화문 대머리집. 대머리집은 이미 그 시절 명물의 반열에 올랐다.

서울역사박물관이 2009년 8월 그 막걸리집의 너덜너덜한 외상장부 세 권을 전시목록에 떡 하니 올려놨던 것이다. 그 집에 드나들던 당대의 기자와 문인들이 1960년대 기자 사회 풍속사의 한 자락으로 화려하게 등극하던 순간이었다. 외상술을 퍼마셨던 그들은 당시가 소주 유행 이전이라서 정종이나 막걸리를 주로 마셨고 안주로는 김치에 북어포가 주종이던 시절이다.

전후 1950년대 명동에 은성이 있었다면 60년대엔 대머리집이 바통을 이어받은 셈일까? 세상이 알 듯 은성은 탤런트 최불암의 모친 이명숙 여사(86년 작고)가 운영하던 대폿집으로 시인·소설가 박인환·김수영·변영로·전혜린·오상순·천상병 등과 기자들의 아지트였다. 나애심이 불렀던 샹송풍의 ‘세월이 가면’이란 노래를 박인환과 이진섭이 어느 날 뚝딱 만들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와 또 다른 분위기가 대머리집. 상대적으로 주머니가 가벼운 편집기자들을 중심으로 동아일보 한갑수·손세일·천상기·안종필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외상장부엔 그들의 명단까지 죄다 나온다. 조선일보 기자론 김경환을 필두로 조영서·이규은·이유경·배우성·김종환 등이 단골. 막 창간했던 중앙일보 편집부의 구자익을 비롯해 서울신문·한국일보의 술꾼 패도 즐비했다. 참고로 주머니가 여유 있던 취재기자들은 양주를 파는 봉숙이집에서 죽쳤다.

이후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모두가 깔끔해졌고 누구나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한다. 이런 와중에 바보 같은 술고래들 이야기는 무슨 야인시대 활극처럼 들린다. 그걸 회고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역사는 결국 이야기로 남는 법이다. 옛 기자 사회의 술판 문화를 통해 그들의 울분과 꿈틀거림을 잠시 느껴 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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