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산의 울림] 북한 사람들이 한국인을 믿지 못하는 된 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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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산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2-15 06:31:10

북한이 경제난으로 허덕이던 1998년 말 어느 날 아침 출근 시간이었다. 평양의 문수거리에 자리한 ‘은하무역지도국’ 바깥마당에는 낯선 지프차 한 대가 서 있고, 차 안에서는 건장한 사내들이 출근하는 정무원들로 붐비는 정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9시가 지나자 정문은 조용해지고 모든 사무실에서는 조회 겸 노동신문 독보를 시작했다. 이때 지프차 안에 있던 사나이 세 명이 정문을 통과하여 건물 1층에 있는 제4무역관리국 사무실로 가더니 조회 준비를 하던 김영수 국장을 밖으로 불러냈다.

그들은 김영수가 맞는지를 재차 확인하더니 자기들과 같이 가자고 했다. 김영수가 사무실에 가서 책상을 정리하고 나오겠다고 했으나 괜찮다고 하며 양옆에서 팔을 잡고 데리고 나와 지프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갑자기 사라진 국장 때문에 수출4국은 혼란에 빠지고 은하무역지도국 전체가 술렁거렸다. 다음 날에는 김영수의 아내가 사색이 되어 직장으로 찾아와 간부들을 만났지만 누구도 김영수가 왜, 어디로 갔는지 답을 주는 자가 없었다.

4국장 김영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 나가 중국 무역회사들과 연간 수백만 달러어치의 대규모 피복 임가공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침체되었던 북한의 피복가공 수출계에 혜성처럼 떠오른 존재였다. 중앙당 경공업부장 김경희도 그를 총애하며 무역일꾼들은 그를 본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1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혜성같이 떠올랐던 그를 무너뜨린 것은 대한민국에서 날아든 종이 한 장 때문이었다. 북한은 평양 보통강구역에 ‘통신센터’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외국과의 모든 통신 거래는 오직 이곳을 통해서만 하도록 강요한다.

그해 가을밤 저승사자가 김영수 국장 앞으로 보내는 팩스 한 장이 평양통신센터로 날아들었다. “존경하는 김영수 국장님 귀하, 우리는 귀하와의 약속대로 만반의 준비를 마쳤으니 상품 출하 날짜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귀하의 건강을 바랍니다. 대한민국 통일부 장관 강인덕.”

이 팩스를 받은 평양엔 ‘폭풍 1호’가 몰아쳤다. 공화국 선포 후 50년 만에 처음 보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국가안전보위부엔 총비상이 걸렸다. 김영수 국장과 함께 중국에 출장 나갔던 국가보위원도 체포하여 심문했다. 그리고 김영수 국장과 거래했다는 중국 무역회사들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도 중국에 파견했다. 또 쥐도 새도 모르게 김영수도 체포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영수와 피복 임가공 수출입 계약을 맺었던 그 무역회사들은 중국 무역회사의 이름을 빌린 남조선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모든 북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영수도 북한이 얼마 못 가서 무너질 것이라 계산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남조선 사람들과 사전 합의를 맺은 것이었다 한다.

김영수는 남조선 사람들에게서 미국 달러도 받았다. 그런데 보위원들이 김영수의 집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중요 증거품인 돈을 못 찾았다. 그래서 김영수에게 다그치니까 자기가 가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김영수를 데리고 집으로 갔더니 냉동고를 열어 꽁꽁 언 고깃덩어리 몇 개를 꺼내 녹여 보라고 했다. 녹여 보니 정말 달러 뭉치가 나왔다.

김영수는 보위부에서 “나는 우리 조선도 앞으로 분명히 경제가 무너지고 개혁개방으로 갈 것이 분명하기에 그때를 대비해서 남조선 사람들과 길을 좀 터 놓을 준비를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조선의 강인덕을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는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다. 예심원이 내미는 강인덕의 싸인이 있는 팩스를 보고는 “나는 남조선 사람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만 했다고 한다. 그후 김영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지난날 한국 사람들과 손잡았다가 한국 사람들의 배신으로 한을 품고 죽어 간 북한 사람 중 내가 잘 아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한국 사람들의 배신 때문에 죽어 갔는지는 먼 훗날에야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이래서 담당 보위원은 나를 볼 때마다 “태산 동무도 외국 나가서 절대 남조선 애들을 만나지 마라. 아무리 몰래 만나도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우리 쪽으로 자료가 100% 넘어오게 돼 있다. 조심하지 않았다가는 김영수처럼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한국에 와서 조사를 받으며 조사관에게 “당신들은 왜 그렇게 한심하게 일처리를 해서 김영수 국장을 죽게 했느냐”고 물었다. 조사관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누가 대북 관련 일을 해 보자고 찾아오면, 물론 능력도 안 되지만 단호히 거절한다. 자기 집 안 청소도 제대로 못 하는 한국 사람들과 일을 하다가 까딱 잘못되면 북한의 죄없는 친구들만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강인덕 장관의 이름으로 북한에 고발 팩스를 보낸 사람이 살아서 이 글을 본다면 이제라도 자기 죄를 뉘우치기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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