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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View] ‘도적 떼’로 몸살 앓는 미국
김학형 국제팀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1-10 00:02:40
▲ 김학형 국제부장
술 작품에서 도둑질은 종종 가벼운 범죄처럼 그려진다. 작품 속 그들은 생활고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뭔가를 훔친다. 그 모습에서 독자·관객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화상을 보거나 하루하루 먹고살려고 몸부림치는 자기 처지를 읽는다. 고전으로 꼽히는 소설 레 미제라블’(1982)과 영화 자전거 도둑’(1948)이 딱 그렇다. 영화 기생충’(2019)에서도 가난한 주인공 가족은 위선적인 부자 가족에게서 많은 것을 훔치며 기생하지만, 멸시를 당하고 분노한다. 출제자(작가·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는 불쌍한 사람에게 마음이 쓰이고 약자를 응원하기 마련이다.
 
현실은 다르다. 절도는 아주 오랜 문제라서 그런지 경제적·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른 사례를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시카고 등 일부 주요 도시는 특히 조직화된 도적질로 몸살을 앓았다. 미국 소매업계와 법 집행 당국은 조직적·계획적으로 소매업체의 매장과 창고·트럭 등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훔쳐서 암시장에 재판매하는 행위를 아예 조직적 소매 범죄(organized retail crime)’로 규정했다. 이들은 고가 사치품부터 저가 생필품까지 모조리 쓸어 간다. 한두 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훔치며 대기 중인 조력자와 빠르게 달아난다. 한마디로 좀도둑이 아닌 도적 떼다.
 
미국에서 절도가 증가하는 배경에는 크게 방치와 관용주의가 있다. 관련 뉴스를 보면 매장에 근무 중인 보안요원조차 도선생을 제지하지 않고 보고만 있는다. 총기 소지나 난동 등으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무리하게 막지 말라는 지침 때문이다. 도적 떼도 이를 간파하고 서슴없이 법의 울타리를 넘는다. 경찰 역시 절도범을 잡는 데 미온적이다. 사소한 생계형 범죄라는 이유로 많은 주에서 처벌 수위를 낮췄다. 대부분의 주에서 도둑질은 중범죄(felony)가 아닌 경범죄(misdemeanor). 캘리포니아주에서 절도죄에 대한 처벌은 6개월 미만의 징역형 또는 1000달러 미만의 벌금형에 그친다.
 
그나마 2년 전부터는 절도를 좀 더 강하게 처벌하기 위해 입법을 서두르고 있다. 2022년 이후 9개 주에서 조직적 소매 범죄를 더 엄격하게 처벌하는 법안이 통과됐으며, 작년 말 기준 최소 6개 주에서 유사한 법안이 계류 중이다. 지난해 6월 발효된 온라인 장터 투명성 법안(INFORM Consumers Act)’에 따라 1년에 5000달러 넘는 제품을 200개 이상 파는 사업자는 기본 정보를 거래 플랫폼과 소비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세계 최대 규모 소매유통·무역 협회이자 유력 로비 단체인 미국의 전국소매연맹(NRF)은 지난달 조직적 소매 범죄에 관한 기존 주장을 철회했다. NRF는 지난해 4월 민간 보안 회사인 K2 인테그리티와 공동으로 발표한 보고서에서 2021년 소매업체들의 전체 손실액 945억 달러 중 거의 절반(450억 달러)이 조직적 소매 범죄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NRF는 당시 조직적 소매 범죄를 측정한 외부 데이터에 그와 관련 없는 손실이 포함됐고 총재고 손실에 낡은 추정치가 사용된 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 보고서는 발표 이후 조직적 소매 범죄의 심각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데이터로 여러 관련 뉴스에 인용됐다. 공교롭게도 보고서가 나온 뒤 온라인 장터 투명성 법안이 통과됐고 이후 보고서가 철회됐다. NRF는 이 법안 통과를 위해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펼쳤다. 뒤늦게 잘못된 데이터 사용과 데이터 불일치를 인정하긴 했지만, NRF가 소매업계의 이익을 위해 무리수를 뒀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지우기 힘들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조직적 절도 범죄의 심각성이 크게 훼손된 것 같진 않다. CBS 등 현지 매체들은 NRF의 보고서 철회가 오히려 절도 범죄 측정이나 절도범 추적·처벌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타낸다고 옹호했다.
 
엄복동의 나라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절도는 흔치 않은데 자전거는 훔쳐 간다는 자조 섞인 밈(meme·인터넷 유행어)이다. 실은 국내 자전거 도난 건수는 외국과 비교해 그리 많지 않다. 엄복동의 나라라는 밈은 개개인의 자전거 도난 경험이 확대 재생산된 표현 같다. 자전거 절도가 많다기보다 자전거는 비교적 훔쳐 가는 경우가 많다고 여기는 게 좋겠다. 문제라면 낮은 검거율(2022년 전체 절도 검거율 62.4%·자전거 절도 검거율 33.2%)이다. 자전거 여러 대가 오래 방치되면 자물쇠·바퀴만 남기 일쑤다.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지역 전체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은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과학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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