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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276] 유신과 춘추 ③
뱃속에 있는 아기의 아비가 누구냐?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26 06:30:20
 
 
서력 6427, 백제의 의자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 서변 40개 성을 차지했다. 이어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성주 품석(品釋)과 그의 아내 고타소랑(古陀炤娘)이 죽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신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그중에서도 춘추(春秋)는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이들은 그가 아끼는 사위와 딸이었다.
선덕여왕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 듯하오. 누구를 사신으로 보내는 게 좋겠소?”
간신히 기운을 차린 춘추가 나서며 아뢰었다.
소신이 기필코 일을 성사시키고 오겠습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덕여왕은 춘추가 감정에 치우쳐 대사를 망칠까 두려웠다.
그대의 마음이 큰 슬픔에 빠져 있는데 어찌 몸까지 괴롭히려 하는가?”
신을 믿고 맡겨 주십시오. 절대 폐하께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춘추는 어느새 냉정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자식을 잃은 아비로는 보이지 않았다.
여왕은 굳은 의지에 감동해 그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기로 했다.
왕명을 받고 대궐을 나온 춘추는 떠날 채비를 하려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으로 들어서는데 금방이라도 딸이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 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때까지 주변 사람들에게서 냉정하고 철저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온  그였다. 그만큼 절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날 만큼은 예외였다.
문희(文姬)는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행장을 꾸리는 것을 보고 놀라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춘추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야성의 참사를 힘겹게 전했다. 이를 들은 아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을 치며 오열했다. 고타소랑이 비록 전처소생이기는 했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를 아껴 친딸 못지않게 사랑을 쏟았기 때문이다.
 
춘추는 문희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부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딸 고타소랑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희가 끼어들어 춘추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다.
춘추는 어릴 때부터 유신과 벗으로 가깝게 지냈다. 둘은 의기투합하여 세상사를 논하고는 했다.
춘추는 유신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유신에게는 여동생이 둘 있었는데 언니 보희는 부끄러움이 많은 데 비해 동생 문희는 성격이 활달했다.
문희는 종종 춘추와 어울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가 이미 혼인한 몸이라는 건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문희는 간절한 마음을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보다 무서운 오라비 때문이었다. 유신은 평소에는 호인이었지만 한번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만일 아내가 있는 춘추와 기약 없이 정을 통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영악하고 겁이 없는 문희도 애마(愛馬)조차 서슴없이 죽이는 오라비의 결벽증만큼은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망설이고 있던 문희가 결단을 내리게 된 계기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비롯되었다.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하는 문희와 달리 보희는 늦잠을 자기 일쑤였다. 그래서 문희는 언니를 깨우는 일이 일과가 되다시피 했다.
어느 날 아침, 문희는 언니가 자고 있겠거니 하고 스스럼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보희는 평소와 달리 벌써 일어나 있었다.
문희는 별일이다 싶어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천하의 잠꾸러기가 이리 일찍 일어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보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자못 심각한 걸로 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문희가 언니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보희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나 아주 이상한 꿈을 꿨어. 아무래도 안 좋은 꿈인 것 같아서 심란해. 해몽 좀 해줄래?”
문희는 꿈풀이에 일가견이 있었다.
무슨 꿈이길래? 어디 한번 말해 봐.”
보희의 꿈은 이러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악(西岳)에 오르고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데도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산 정상에 이르자 갑자기 소변을 보고 싶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는 하나 사방이 툭 터진 산 정상에서 소변을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기에 참았다. 하지만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속치마를 들어 올리고 소변을 봤다. 시원한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이상하게 소변이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는 마치 폭포수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산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그녀는 민망하면서도 무서운 생각이 들어 소변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자신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소변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도성을 덮쳤다. 보희는 이에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언니의 꿈 얘기를 들은 문희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판단하기에는 대길할 꿈이었다. 산꼭대기에 오른다는 것은 가장 존귀한 위치에 오른다는 뜻이고, 오줌이 도성에 가득 찬다는 것은 도성에 두루 미치는 막강한 힘을 쥐게 된다는 의미였다.
순간 문희는 질투심이 일었다. 늘 낮춰 보던 언니가 자신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문희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 흉한 꿈은 아니네. 하지만 정 마음이 찜찜하면 내가 그 꿈을 살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으니까.”
보희는 금세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뭘 내놓을 거야?”
언니가 눈독 들였던 비단 치마 어때? 내가 아끼는 옷이긴 하지만.”
문희는 언니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평소 탐내던 치마를 내어놓았다.
찜찜한 기분을 털어 내게 되었을뿐더러 그토록 원하던 비단 치마까지 얻게 되었으니 보희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동생에게 꿈을 팔았다.
꿈을 산 문희는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벅찼다. 앞으로 자신은 고귀한 몸이 될 테니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녀는 설레는 가슴을 누르고 춘추에게 접근할 계획을 세웠다.
 
며칠 후, 유신이 춘추와 여러 낭도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점심을 먹고 무료해지자 집 앞 넓은 마당에 모여 공차기 놀이인 축국(蹴鞠)을 했다. 이때 문희는 평소처럼 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기회를 보아 춘추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일부러 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넘어지는 척하면서 고름을 잡아 뜯었다. 이를 본 유신은 동생의 부주의를 나무란 후에 춘추에게 권했다.
집에 들어가서 꿰맵시다.”
집 안으로 들어선 유신은 하녀를 보내 바느질 솜씨가 일품인 보희를 나오게 했다.
하녀가 말을 전하자 부끄러움이 많은 보희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유신은 할 수 없이 문희를 돌아보며 일렀다.
그럼 네가 꿰매 드리도록 하여라.”
이때 하인이 달려와 아뢰었다.
어르신께서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부친의 부름을 받은 유신은 춘추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실로 사라졌다. 문희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유신이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어색해진 춘추는 창 쪽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문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