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연재소설
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70] 사랑, 타인의 심장과 하나가 되는 신비
정직한 사랑이 독이 될 때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12 06:30:10
 
 
선생님은 절 아세요?”
 
나는 고집스럽게 연극을 계속했습니다.
 
나는 기억을 잃었소.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사람인 걸 잊고 있었소.”
 
당신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더운 엽차가 든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나는 당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어둑한 골목길·흐린 가로등·옷깃 속에 턱을 묻고 총총 멀어지는 행인들. 당신 없이, 낯선 타인들 속에서 나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제 스타일이 아니신 거 같아요.”
 
나는 불안을 털어 내려 게임을 계속했습니다.
 
그쪽도 그렇소.”
 
당신이 대꾸했지요. 나는 눈을 살짝 흘겼습니다.
 
당신이 먼저 시작했소.”
 
빙긋 당신이 웃었습니다. 마침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연극은 싱겁게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눈이 쏟아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당신과 함께 있는 잠깐의 평온함에 빠진 척, 찻집에 조용히 흐르고 있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습니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모했는지, 이름을 불러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나요.”
 
물끄러미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던 당신이 말했습니다.
 
그쪽, 가수는 아닌가 보군.”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무표정하던 찻집 주인조차 무슨 일인가 하고 우리를 흘낏거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기억을 잃어도, 나는 당신을 다시 사랑하게 되리라는 걸. 반복해서 우리가 헤어진다 해도, 나는 또다시 당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걸. 이별뿐인 이 생이 영원히 반복된다 해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태어나서 당신을 만나 사랑하리라는 것을. 비로소 나는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 다음 주에 독일로 떠나요.”
 
그것이 그들의 두 번째 이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독일에서 의무 근로기간 3년을 마치고 갑순이 독일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기다린 건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또 한 번의 운명이었다.
 
사랑이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네. 소수의 사람만 일생에 꼭 한 번, 타인의 심장과 하나가 되는 신비를 경험하지.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네만 3년 후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그녀와 떨어질 수 없다는 걸 인정했네. 그때 이 집을 샀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내에게 고백했네. 더 이상 누구도 기만하고 싶지 않았지. 정직해져야 한다고, 그것이 아내에 대한 도리이고 갑순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네. 나 혼자 정의롭다고 믿었다니, 순진했지. 나의 정직함은 두 여자 모두에게 독이 되었네. 아내가 그녀를 찾아갔어. 친정 식구들을 한 부대 이끌고 가서 본처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 이혼이란 건 생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아이들과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무서운 게 없었을 거야.”
 
기운이 빠지는지 주결은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53
좋아요
29
감동이에요
15
화나요
0
슬퍼요
5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발행·편집인: 조정진, 편집국장: 고동석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