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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78] 아름다운 도시 비스바덴의 저녁
낯선 도시에서 찾은 인생의 수레바퀴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5 06:30:10
 
 
- 첫 급료를 받던 날, 나의 독일어 선생님이 되어 준 비비안에게 맥주를 한잔 사기로 하고 함께 시내로 나갔습니다. 비비안은 퇴근 후 자주 간다는 호프집으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맥주의 맛과 종류가 그토록 다양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사람들이 바에 기대선 채 잔을 부딪치고 웃고 떠드는 호프집의 분위기는 내게 또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비비안은 그곳에서 만난 남자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웃으며 어울렸습니다. 내게도 말을 걸어 오는 남자들이 있었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해서 나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40분쯤 떨어져 있는 비스바덴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병원과 기숙사가 아닌 곳에 혼자 있었습니다. 얼마를 걸었을까. 책이 진열된 상점 앞을 몇 걸음 지나치다가 그곳은 서점이 아닐까, 생각하며 되돌아갔습니다. 운명의 여신이 굴린다는 둥근 바퀴 모양의 문장(紋章) 밑에 독일어로 ‘Glücksrad’라고 글자를 새긴 나무 간판이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낮게 흔들렸습니다.
글릭스라트.”
 
나는 어설프게 발음해 보았습니다. 가방에서 사전을 꺼내 보고 그 단어가 수레바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를 반기는 건 오래된 종이 냄새와 비릿한 가죽 장정 냄새, 잉크 냄새였습니다.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가득한 세계는 내게 부끄러움이었고 공포였으며 동시에 선망이었습니다. 해독할 수 없는 마법에 빠진 것처럼 신비롭기도 했습니다.
 
도와드릴까요. 특별히 찾는 책이 있습니까?”
 
어떤 책도 고르지 못하고 매대 앞에서 마냥 책의 표지를 쓰다듬고 있던 내게 서점 주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아마도 작고 낯선 동양 여자가 두리번거리는 게 신경 쓰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때는 생각했습니다. 키가 몹시 큰 주인은 금발 머리에 선한 얼굴을 한, 가을 하늘처럼 푸른 눈을 가진 중년의 남자였습니다.
 
나는, 좋습니다, 여기.”
 
더듬더듬, 나는 서툰 독일어로 대답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짓더니 가슴에 달린 이름표를 가리키며 미하엘 크라우스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마음껏 돌아보라고,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와도 좋다고, 그가 말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근무를 마치고 종종 서점을 찾았습니다. 그때마다 미하엘은 미소로 반겨 주었습니다. 그가 내게 말을 걸어 주지 않는 것이 고마웠습니다. 독일어에 능숙하지 않은 동양 여자에게 말을 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그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읽는 것을 중단하고 미하엘의 이름을 다시 보았다. 미하엘 크라우스? 나는 노트의 맨 앞 장을 열었다. 분명 노트의 제목 찬란한 상실그 아래, 에바 크라우스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 남자와 결혼했다는 건가? 하지만 에바는 죽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노트는 대체 뭐지? 발설하면 안 되는 엄청난 비밀을 나 혼자 알아 버린 사람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에바의 이야기가 계속되길 바라며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
 
- 나는 독일어로 가득 채워진 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책의 표지를 만지고 눈을 감고 종이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표지를 열어 작가의 얼굴을 보고 제목의 활자를 그림처럼 감상했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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