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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명소산책] 시련의 왕자 볼테르의 최종 안식처 ‘페르네이’
프랑스 쥐라와 스위스 레만호의 접경지
볼테르가 ‘독립적이고 완벽한 자유’를 누린 곳
최인숙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08 09:20:07
▲ 최인숙 문화칼럼니스트·정치학박사
볼테르는 마흔 살이 되면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은행가들과 우정을 쌓은 덕에 투자와 투기 방법을 알게 돼 큰돈도 벌었다. 이 재산 덕에 그는 자신의 저술이 비난을 받을 경우 하룻밤에 프랑스를 떠날 채비를 항상 할 수 있었다.
 
1734 그는 철학자들의 편지를 무단으로 출판한 혐의로 위험에 처했다. 프랑스의 도덕과 제도에 대해 비판한 이 책은 큰 파문을 일으켜 그는 시레이 성으로 피신해야 했다. 거기서 그는 익명으로 수십 편의 글을 발표했다. 탁월한 설득력으로 유머와 해학을 곁들여 왕과 교회·법관의 권력을 고발하고 사회적 폐해를 비판하는 작품들이었다.
 
1744년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지원으로 그는 베르사유 궁에 들어가 루이 15세의 역사학자가 됐다. 예술과 문예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퐁파두르는 진보적인 철학자와 작가들에게 호감을 갖고 반대 사상을 전파하는 학자들을 지지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볼테르였다. 1745년 그는 왕실 축제를 위한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 이듬해 52일 그가 그토록 원했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그러던 중 볼테르는 루이 15세 왕을 둘러싼 궁정의 음모를 발견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집필한 작품이 1747년 출판된 자디그(Zadig)’의 첫 번째 버전인 멤논, 동양의 역사였다. 추론을 과학적 방법으로 이용한 이 작품은 환상의 동양에서 세상을 경험하는 청년 자디그의 모험을 스릴 넘치게 전개한다. 대중적 인기를 얻은 이 작품으로 볼테르는 성공가도에 올랐고 부를 쌓게 됐다. 이제 그는 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이 됐다. ‘볼테르 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 공중에서 포착한 페르네이 전경. 위키피디아
 
이 작품은 극도로 대담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는 다시 한 번 위험에 처했다. 분노한 루이 15세는 그를 궁정에서 추방했다. 게다가 새로운 세대의 철학자들과 경쟁하는 데 볼테르는 그는 그만 지쳐 있었고 어디론가 또 떠나야 했다. 샤틀레 부인이 타계했기에 다른 후원자를 찾아야 했다.
 
때마침 프로이센 국왕 프레데릭 2세가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넸다. 이전부터 신성한 시인이라 불리는 볼테르를 왕은 그의 프랑스어·시학·수사학·철학의 스승으로 모시기를 원했지만 샤틀레 부인의 반대로 무산되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졌기에 볼테르는 왕의 초청을 받아들이게 됐다. 1750년 그는 베를린으로 건너가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로코코 양식의 상수씨(Sanssouci) 궁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3년간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왕은 2만 파운드의 연금을 그에게 줬고 종종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사실 이 둘의 인연은 오래 전에 시작됐다. 173688일 프레데릭 2세는 볼테르에게 불어로 첫 편지를 썼다. 이 젊은 왕자는 독일어는 나의 말()을 위한 것이라며 자국어보다 프랑스어를 선호한다고 볼테르에게 아첨을 떨었다. 볼테르는 이 왕자에게 깊은 존경심을 담아 답장을 했고 그 후 서신은 계속됐다.
 
군주로 등극한 프레데릭 2세는 15년 후 세상을 계몽하겠다는 의지로 볼테르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초창기 두 사람의 만남은 환상적이었다. 프로이센 군주의 호의적인 대접을 받으며 볼테르는 왕의 시를 검토해 줬고 그의 친구이자 안내자·멘토로 활약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볼테르는 왕에 대한 에티켓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왕의 동성애를 언급하며 많은 덕목을 강요했고 특히 베를린 왕립 과학 아카데미 회장인 모페르튀이에 대한 팸플릿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격돌했다. 반목과 갈등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이어졌다. 왕은 볼테르가 쓴 교황 주치의 닥터 아카키아의 다이어리사본을 압수했다. 이 책은 모페르튀이를 비롯한 허세에 가득 찬 과학자들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아카데미의 후원자였던 프레데릭 대왕은 이에 대노했고 1752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책을 불태우고 말았다.
 
▲ 페르네이 볼테르거리에 세워진 볼테르 동상. 위키피디아
 
볼테르는 1753년 마침내 상수씨 철학자의 시원고를 들고 궁정을 탈출했다. 프레데릭 2세는 그를 프랑크푸르트에서 체포했다. 한 달 후 겨우 풀려난 볼테르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프로이센인으로 간주돼 프랑스 왕은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연인이었던 드니부인에게 두 왕 사이에 끼인 나귀처럼 위태롭고 또 위태로운 상황이다라며 자신의 걱정을 서신으로 털어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볼테르는 1758년 고국의 품에 안겼다. 그의 둥지는 스위스와 인접한 젝스의 페르네이 마을이었다. “철학자는 항상 그를 쫓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구멍을 마련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프랑스에 한 발, 스위스에는 다른 한 발을 걸친 채 살았다. , 한편으로는 쥐라를, 다른 한편으로는 레만 호수와 알프스를 바라보며 지냈다.
 
당시 페르네이는 습지로 둘러싸인 비참한 마을이었고 겨우 1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왜 저명한 철학자가 이 외딴 지역을 선택했을까? 그의 라이벌 루소의 고향과 가깝고 한편으로 독립적이고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네이는 제네바에서 파리로 가는 길과 리옹으로 가는 두 개의 길에 수직으로 펼쳐져 있다.
 
이곳에 영지를 매입한 볼테르는 자신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한편, 도시 계획가이자 기업가이며 예술 후원자였던 그는 습지를 정리해 주택과 공공 분수대, 새 교회를 짓고 거리를 포장하고 공예 산업을 발전시키는 등 페르네이를 불과 몇 년 만에 급속도로 성장시켰다. 볼테르는 여기서 13000통이 넘는 다량의 서신을 유럽 전역으로 보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네트워크를 유지하여 메시지를 전파하고, 자신의 신념을 변호했다. 페르네이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볼테르가 유럽과 미국의 위대한 지성을 만나는 철학적 보고로 유명해졌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이곳의 지명은 페르네이-볼테르로 개명됐고 마을 중앙에 서 있는 볼테르 동상에는 페르네이의 은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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