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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90] 2010년, 하운의 여름
태풍이 쓸어 간 것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16 06:30:10
 
 
 
2010년 여름.
 
밤새 바람이 불었다. 널빤지와 간판들이 날아다니고 나무는 뿌리째 뽑혔다. 익지 않은 은행과 시들지 않은 나뭇잎들이 싸락눈처럼 쏟아졌다. 동우는 비행기를 탔을까? 창문을 후려치는 바람 소리에 놀라 하운은 몇 번이나 침대에서 일어나 소란한 암흑을 바라보았다.
 
비는 그쳤지만 아침이 되어서도 저녁 어스름이 내린 것처럼 사위는 어두웠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았다. 컴퓨터도 인터폰도 전화도 끊겼다. 엘리베이터는 굳게 문을 닫고 몸을 열지 않았다. 열일곱 층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수백 개의 규칙적인 간격과 반복되는 회전이 어지럼증과 멀미를 일으켰다. 난간을 붙잡았는데도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지하 주차장은 빛이 닿지 않는 바닷속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세상에 혼자 살아남은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이명처럼 들렸다. 비상구 표시등이 먼 등대처럼 희미한 빛으로 명멸하고 있었다.
 
전력이 복구될 때까지 마트는 영업을 시작하지 못했다. 하운이 장바구니를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마트를 빠져나왔을 때는 오후가 훌쩍 지나 있었다. 밤새 핏물을 빼놓은 고기를 건져 양념장에 재어 놓았다가 갈비찜을 저녁상에 올리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동우가 좋아하는 횟감으로는 수족관에서 가장 빠르게 헤엄치던 돔을 골랐다.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수입 가구업체에 다니던 동우는 퇴사한 뒤 개인 매장을 열고 유럽의 앤티크 가구를 수입했다. 미술이나 디자인을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양적인 공간과 탁월하게 매치시키는 동우의 안목과 마케팅 실력은 인테리어 업계에서 평판이 높았다. 동우는 한 달 중 반 이상은 해외 출장을 다니며 가구를 선별해 들여왔다. 이번엔 황실가구 수입을 위해 러시아와 동유럽을 돌아보고 올 거라고 했다.
 
하운은 뒷자리에 놓아둔 회 접시를 돌아보았다. 태풍 뒤라고는 해도 차 안은 후텁지근했다. 손을 뻗어 접시를 앞자리로 옮겨 놓은 뒤 조바심에 에어컨을 켜고 온도를 낮추었다.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큰바람이 쓸고 간 하늘은 가을처럼 푸르고 시렸다. 앞 유리창으로 손톱보다 작은 비행기가 은빛으로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모스크바를 출발해서 인천공항에 도착 예정이던 비행기의 착륙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비행기는 전소된 상태이며 현재 인명 피해 및 사고 원인을 파악 중이라고 하네요.”
라디오 디제이가 속보를 전했다. 승객들이 무사하길 바란다는 멘트 다음에 오페라의 아리아가 이어졌다. 곡의 제목을 흘려듣고서야 하운은 조금 전 진행자의 멘트를 곱씹었다. 흠칫,정수리가 뾰족하게 잡아당겨지면서 소름이 끼쳤다. 다른 주파수가 입력된 버튼을 이것저것 눌렀지만 뉴스 채널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비행기가 추락하고 누군가는 죽었다는데 세상엔 댄스곡이 넘쳐나고 잡담과 웃음소리들이 요란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불안이 비누 거품처럼 부풀었다.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 블록 건너 가전제품 전시 판매장이 보였다. 하운은 단번에 차선을 바꾸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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