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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도성인 장안성 외곽에 있는 무기창에서는 망치 두드리는 소리와 쇳물 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곳은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곳으로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다. 높다란 담이 둘러쳐져 있고 무장한 군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이었다. 입구 쪽이 술렁거리더니 무기창의 관리들이 황급히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사람이 무기가 만들어지는 공방(工房)으로 몰려왔다. 시위장을 필두로 수많은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는 사람은 바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 일컬어지는 당 고종이었다.
공방의 대장(大匠)이 급히 뛰어나오며 예를 갖췄다.
“어인 일로 폐하께서 친히 납시셨습니까?”
“구진천(仇珍川)의 작업은 어찌 되고 있느냐?”
고종의 물음에 대장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완성하기는 했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고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당장 구진천을 대령하라!”
대장의 명을 받은 장인 하나가 공방 안에 있는 구진천을 불러왔다. 그는 체격은 작지만 눈빛이 맑고 당찬 인상의 사내였다. 감색으로 물들인 베옷을 입었는데, 이는 신라 고유의 복색이었다.
고종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지난번에는 재목이 적당치 않다고 하여 해동(海東·한반도 지역)에서 어렵사리 목재를 들여왔는데 이번에는 또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쇠뇌에 쓰이는 재목은 매우 섬세하게 다뤄야 합니다. 이번에 들어온 목재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이 없지만 바다를 건너오면서 소금기가 침입한 듯합니다. 이대로는 사정거리를 늘릴 수 없습니다.”
“네놈이 짐을 능멸하려 하느냐? 내 보름의 말미를 주겠다. 그때까지 신라 쇠뇌의 성능을 능가하지 못한다면 목을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풍겨 나오는 살기를 보아서는 허언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구진천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국 신라와 동포였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 정벌에 나서면서 당인들이 신라군의 무기 중 눈여겨본 것이 바로 쇠뇌였다. 당군의 쇠뇌가 기껏해야 화살을 삼사백 보 날릴 수 있는 데 비해 신라의 쇠뇌로 쏜 화살은 1000여 보를 넘게 날아갔다. 신라의 쇠뇌는 공성전이나 넓은 평야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신라군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했다.
이 무렵 당은 한창 세력을 넓히고 있던 토번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토번은 당 고종이 고구려와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당나라가 관장하던 비단길을 점령했다. 당에는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고종은 고구려 땅에 주둔하고 있던 주력 부대를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막강한 토번의 기병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군이 고전하자 고종은 신라의 쇠뇌처럼 뛰어난 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 노사(弩師) 즉 쇠뇌 기술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동맹국이었던 신라와 당 사이에는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 고종은 나당 연합군이 결성될 당시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면 백제 땅과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을 신라에 넘겨주겠다고 약조했다. 하지만 이를 어기고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세워 직접 통치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신라인들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과거 백제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움츠리고 있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게다가 자칫하면 당군에게 신라의 영토를 빼앗길 위험마저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문무왕은 당나라가 토번과 싸우는 틈을 타서 백제의 남동부 지역 일부를 점령했다. 이를 기반으로 백제 땅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것이었다.
당의 반발은 예상보다 거셌다. 고종은 당장 사신을 보내 백제 땅에서 신라군을 철수시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전쟁이라도 불사할 듯한 강경한 태도에 문무왕은 당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당과 전쟁을 치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무왕은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良圖)를 사신으로 보내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런데 고종은 신라의 죄를 물어 사신을 옥에 가두었다. 이는 명백히 신라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문무왕은 사신의 투옥 소식을 듣고 당과의 전쟁을 결심했다. 이후로 신라는 겉으로는 당에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안으로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몇 달 뒤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쇠뇌 기술자를 보내라 했을 때 문무왕은 고민에 빠졌다. 쇠뇌를 만드는 기술을 당에 전수하면 훗날 그 화살이 신라로 날아올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절하면 당의 진노를 불러올 수 있었다.
심사숙고 끝에 문무왕은 명장(明匠) 구진천을 불렀다. 그는 쇠뇌 제작에 일가를 이룬 인물로 심지가 굳고 담력이 셌다.
문무왕이 구진천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저들이 노사를 보내달라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나? 절대 당나라에 우리 기술을 넘겨줄 수는 없다.”
“제가 이제껏 조국과 폐하의 은덕 덕분에 살아왔는데 어찌 폐하의 근심을 모른 체할 수 있겠습니까. 심려 마시고 저를 당나라로 보내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신하겠습니다.”
문무왕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자네가 끝끝내 기술을 내놓지 않는다면 저것들이 자네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을 텐데.”
구진천이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나라가 없어지는데 어찌 제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조국이 있음으로 해서 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무왕은 감격에 목이 메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자네에게 보답할 수 있겠나?”
구진천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아비이고, 저를 알아 주신 분은 폐하이십니다. 보답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이 목숨을 바쳐 기술을 지켜 내겠습니다. 절대로 기술을 유출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나라에 건너간 구진천이 호락호락 쇠뇌를 만들어 바칠 리 없었다. 그가 장안에서 처음 만든 쇠뇌에서 쏘아진 화살은 채 30보를 날지 못했다. 큰 기대를 하고 시험을 직접 참관했던 고종은 마음이 몹시 상했다. 하지만 신라 쇠뇌에 매료된 임금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구진천으로부터 실패의 원인이 쇠뇌의 주재료인 나무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재목을 구하기 위해서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문무왕은 대나마 복한(福漢)에게 명해 목재를 싣고 당으로 건너가게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쇠뇌의 사거리는 그다지 늘어나지 않았다.
구진천은 당나라 무기창에서 일하며 대량의 무기가 제조되고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기의 막대한 물량에 놀랐다. 그러한 무기들이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테니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규모일 것이었다. 토번과의 전쟁이 끝나면 그것들이 고스란히 신라를 겨눌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그는 새삼 신라가 급박한 위기에 처했음을 깨닫고 이를 알릴 방법을 모색했다.
이때 신라의 고승인 의상이 장안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구진천은 무기창의 통인을 매수하여 은밀히 의상에게 서찰을 보냈다.
지난날, 원효와 헤어져 당으로 들어온 의상은 양주의 장군 유지인(劉至仁)의 배려로 관아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종남산 지상사에 계신 지엄(智嚴) 대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그 밑에서 화엄의 묘리를 공부했다. 고된 수행 끝에 도를 깨달은 그는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종남산을 떠나 장안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국의 재상인 흠순과 양도가 옥에 잡혀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흠순과 친분이 있었던 의상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의상은 은밀히 줄을 대 옥중에 있는 흠순을 만났다.
“얼마나 고초가 심하십니까?”
“이렇게 대사의 얼굴을 보니 기쁘기 한량없소.”
흠순은 습하고 어두운 감방에서의 수형 생활 탓에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다. 호방한 기상을 뽐내던 용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나라 황제는 그리 무도한 자가 아니니 곧 풀려나실 겁니다. 그때까지 몸을 보중하십시오.”
의상은 흠순을 위로했다.
“내 한 목숨 죽는 거야 뭐 그리 대수겠소. 그저 신라의 앞날이 걱정이오. 당 조정의 분위기를 보아 하니 신라를 칠 결심을 굳힌 듯하오. 어서 돌아가셔서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 주시오.”
흠순은 이미 삶을 포기한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은 잃지 않은 모습이 의상을 감동하게 했다.
“저 또한 승려 이전에 신라의 백성입니다. 당장 이 길로 신라로 떠나겠습니다. 부디 살아만 계십시오.”
대사는 옥졸에게 떠밀려 나가면서 흠순에게 다짐했다.
짐을 푼 객점으로 돌아가는 의상의 머릿속에서 눈이 퀭하고 볼이 팬 흠순의 비참한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그가 객점으로 들어서자 행자가 서찰을 전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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