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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고의 명장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김유신의 죽음은 백성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줬다. 당군의 공세로 신라가 궁지에 몰린 상태였기에 그의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졌다.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국 신라를 승리로 이끌었던 유신이 있었기에 신라 백성은 막강한 당나라와 맞붙어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처럼 넓게 그늘을 드리우던 아름드리나무가 사라졌으니 민심이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아찬 대토(大吐)와 같이 모반을 꾀하여 당에 항복하려는 자도 나타났다.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일단락되긴 했지만 이는 신라인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유신의 죽음을 전해 들은 당장 고간은 이를 호기로 여기고 거란족 군사까지 포함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호호탕탕 호로하 이남으로 쳐내려왔다.
당의 대군이 공격을 재개했다는 소식을 접한 문무왕은 뜻밖에 담담했다. 마치 진작부터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침착한 태도였다.
“조금도 동요하지 마라. 태대각간의 육신은 차갑게 식었지만 그의 기백은 절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의 혼령이 우리 신라를 수호할 것이다.”
문무왕은 유신이 운명하기 며칠 전 그의 집을 방문했던 일을 떠올렸다.
유신은 국왕을 알아보고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오랜 병치레 탓에 바싹 마르고 기운 없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를 본 문무왕은 눈물을 쏟고 말았다. 군신 관계를 떠나서 유신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었고, 믿고 기댈 수 있는 외숙부였다. 칼 한 자루를 들면 그 위세만으로도 산천을 떨게 했던 대장군의 모습이 쇠락한 걸 보니 새삼 세월의 무상함이 폐부를 찔렀다.
“그대로 누워 계십시오. 숙부님.”
오늘만큼은 신라의 임금이 아니라 유신의 살가운 조카가 되고 싶었다.
유신은 몸을 일으키는 것을 포기한 채 누워서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신이 언제까지고 성심을 다해 폐하를 받들고자 했으나 하늘의 섭리만은 거스를 수 없나 봅니다.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외숙부님이 떠나시면 이 나라와 백성은 어찌합니까. 제발 기운 차리십시오.”
문무왕은 침상에 가까이 다가가 유신의 손을 잡았다. 꼭 쥐면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이 뼈만 앙상히 남아 있었다.
“어리석은 신이 나라에 무슨 큰 보탬이 됐겠습니까. 모든 것은 폐하의 밝은 덕에 기댄 덕분입니다.”
유신이 힘이 드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동안 고구려·백제를 물리치고 삼국을 아울렀다지만 여전히 당군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군신이 솔선수범하고 백성이 한마음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예부터 대통을 이은 임금 중 재위 기간 내내 선정을 베푼 이는 드뭅니다. 하루아침에 선대가 쌓은 공적을 무너뜨리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늘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경계하십시오. 그러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이 편안할 겁니다. 이 나라가 반석 위에 설 수만 있다면 소신은 여한이 없습니다.”
“귀한 말씀,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문무왕의 음성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오직 나라와 백성만을 걱정하는 노신의 모습은 감당하기 벅찰 만큼 큰 감동을 안겨 줬다.
며칠 후 김유신은 오로지 전장으로만 기억될 이승을 떠났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성대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문무왕은 지난날 유신이 일러준 대로 호로하와 왕봉하 사이에 십여 개의 성을 쌓고, 백제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창설하여 군세를 확장했다. 이는 당군과의 장기전에 대비한 것이었다. 또한 북변에 지원군을 보내는 한편 당군이 해로로 침입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아찬 철천(徹川)에게 군선 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했다.
문무왕의 빈틈 없는 대비와 배수진을 친 신라 군사들의 활약으로 호로하와 왕봉하 사이에서 벌어진 아홉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신라군은 전승을 거두었다. 이에 고간이 이끄는 군대는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황급히 호로하 이북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신라는 석문의 패배와 유신의 죽음으로 의기소침했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당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 고종은 대로했다. 그는 신라의 문무왕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장차 자국을 위협하는 우환거리가 되리라 여겼다.
“당장 인문을 대령하라.”
고종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뛰어나간 시위는 곧 인문을 데리고 돌아왔다.
“신라 왕이 짐을 능멸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니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내 그의 관작을 삭탈하고 폐위시킬 것이니 너는 신라로 돌아가서 형 대신 왕위에 오르도록 하라.”
고종의 의도는 명백했다. 당에 저항하는 문무왕을 제거하고 친당파인 인문을 왕위에 앉힘으로써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문은 왕권에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오로지 신라가 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나라로 성장하기를 바랐고 자신이 그 일에 일조하기를 원했다.
인문은 고종의 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당주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로서는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고종은 삼국의 정세에 밝고 지략이 뛰어난 유인궤를 계림도행군 총관으로 삼고 이필과 말갈 장수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임명해서 인문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라 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원정은 토번의 배후 조종을 받은 천산 지역의 여러 부족이 당에 반기를 들면서 연기됐다.
문무왕은 이 틈을 타서 당에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서북부 전선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파병을 미루었다. 그 사이 신라는 성곽을 견고히 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는 등 방어 태세를 일층 강화했다.
서력 675년 2월, 토번과 화친을 맺은 당 고종은 미루었던 신라 공격을 재개했다. 계림도행군 총관 유인궤는 대군을 이끌고 호로하 남쪽에 있는 칠중성으로 쳐들어갔다.
칠중성은 호로하에서 수심이 낮은 곳 가까이에 있는 성이었다. 사방이 뚫려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유리한 요충지였다.
유인궤는 이근행이 이끄는 말갈군이 호로하를 거슬러 올라와 합류할 때를 기다렸다가 칠중성을 공격했다. 신라 군사들이 끝까지 용맹하게 싸웠지만 결국 성은 당군에게 함락됐다.
기세가 오른 유인궤는 곧바로 이근행을 보내 매초성(買肖城)을 점령했다. 매초성까지 어렵지 않게 수중에 넣었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은 신라군을 얕보게 됐다. 그래서 유인궤를 소환하고 이근행을 안동진무사로 임명하여 전권을 부여했다. 이근행이 지휘하는 20여 만의 말갈군은 그 위세만으로도 신라군을 제압할 수 있을 듯했다.
호로하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이근행은 물 만난 고기와 같았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그동안 골칫거리였던 신라군을 격파한다면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몸이 달아오른 이근행은 군사를 이끌고 남하했다. 하지만 호로하와 왕봉하 사이에 자리 잡고 긴밀한 연계 작전을 펼치는 신라의 성들을 통과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일일이 성을 함락시키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그냥 지나치면 후위를 공격당해 보급로가 끊길 위험이 있었다.
이근행이 몇 달째 진퇴를 거듭하고 있자 고종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당장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토번이 언제 다시 도발해 올지 몰랐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신라 문제를 매듭짓고 싶었다. 그는 설인귀에게 다시 선단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가서 이근행을 돕게 했다.
설인귀가 영내를 돌아보고 장군부에 당도했을 때 당나라 관복을 입은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총관이 반기며 말했다.
“드디어 내일 신라로 출항이네. 지난번에는 길을 잘못 들어서 적의 기습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자네가 향도로 나서 준다니 걱정이 없네. 반드시 승리할 테니 애써 주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일인데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청년의 눈은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선친의 일은 정말 애석하네. 그처럼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를 죽이는 무도한 임금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설인귀는 청년을 위로하는 척하며 이간질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은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지어주신 풍훈(風訓)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이를 바로잡겠습니다.”
청년은 바로 숙위이자, 유학생으로 당에 머물고 있던 김풍훈이었다. 그의 부친인 진주(眞珠)가 고국에서 처형당하자 복수심을 품고 당군의 향도 역할을 자청한 것이었다.
김진주는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과 더불어 계백의 결사대를 격파했고, 당군과 함께 고구려 원정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내사지성(內斯只城·대전 유성)에서 일어난 백제 유민의 봉기를 진압할 때 병을 칭하고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풍훈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아버지는 결코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비겁하게 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백 번 양보해서 과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목숨까지 빼앗을 만큼 큰 죄는 아니었다.
풍훈은 아버지가 처형당한 것이 그를 질시한 세력이 부린 농간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이번에 당군과 함께 금성으로 들어간다면 반드시 진상을 조사해서 부친의 무고함을 밝힐 생각이었다.
호로하와 왕봉하가 만나는 지점인 천정구(泉井口·임진강 입구)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지역이었다. 호로하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때를 잘 맞춰 밀물을 타야 했다. 천정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성이 바로 천성(泉城·오두산성)이었다. 당군으로서는 이곳을 장악해야만 이근행이 주둔하고 있는 매초성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강어귀에 상륙한 당의 선봉대가 천성으로 접근했다. 성안에서 활을 쏘며 저항했지만 그리 격렬하지는 않았다. 설인귀는 성의 수비가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걸 간파하고 선단을 뭍으로 가까이 접근시켰다.
당군이 상륙을 시작한 지 한 시진 정도 됐을 때였다. 성 옆으로 구부러진 능선을 따라 흐르는 강에서 전함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불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신라 장군 문훈(文訓)이 이끄는 군선이었다.
예상치 못한 신라 군선의 출현에 당황한 설인귀는 배를 뒤로 물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밀물을 탄 배의 방향을 돌리는 것은 무리였다. 화염이 서로 뒤엉킨 당의 군선들을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당군은 불길을 피해 물로 뛰어들었다. 신라 군사들이 쏜 화살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신라 군선은 당선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허를 찔린 상태로 계속 싸우다 보니 당군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더구나 곧 썰물이었기에 설인귀는 북을 쳐서 상륙한 군사들을 철수시켰다.
썰물 때가 되자 배들이 차츰 바다 쪽으로 밀려 나갔다. 설인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뱃머리를 돌렸다. 당의 수부들이 죽어라고 노를 저었다. 하지만 바닷물이 빠지는 속도는 바람과 같이 빨랐다. 물이 빠지면서 여기저기 개펄이 바닥을 드러냈다. 덩치가 큰 당선은 순식간에 펄에 갇히고 말았다.
뭍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라군이 불화살을 쏘며 당선으로 달려들었다. 선박은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다. 결과적으로 당선 수백 척이 전소했고, 살아남은 당군은 신라군의 포로가 됐다.
설인귀는 천신만고 끝에 좁은 수로로 빠져나와 바다에 당도했다. 그는 갑판이 내려앉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뒤따르는 배가 백 척도 되지 않았다. 기벌포 전투 이래 가장 비참한 패배였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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