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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가 낙담하고 있을 때 풍훈이 탄 배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선실로 들어선 풍훈은 옷이 찢기고 흠뻑 젖은 데다가 얼굴에 긁힌 상처투성이였다. 그 역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침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네. 하지만 이미 전력의 상당수를 잃었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신라군과 싸울 수 없다.”
설인귀는 크게 겁을 먹고 철군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수장의 의중을 파악한 풍훈은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신라 화랑의 지침인 세속오계를 보면 싸움에 임해서 절대 물러서지 말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패배를 두려워해서야 어찌 승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설인귀는 경멸의 눈초리로 풍훈을 빤히 쳐다봤다.
“자네 말이 맞네. 그렇다면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조국을 배반해도 된다는 가르침도 있는가?”
당장은 비웃음을 띤 채 선실을 빠져나갔다.
설인귀의 야유에 풍훈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선실을 빠져나온 풍훈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버지를 위한 복수와 명예 회복은 끝내 이룰 수 없는 망상일지도 몰랐다. 조국과 동포를 배신한 집안이라고 자손 대대로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풍훈은 뱃전에 서서 점점 멀어져 가는 육지를 바라봤다. 석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를 보니 피를 쏟으며 죽어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풍훈의 몸이 허공으로 훌쩍 솟구쳐 올랐다. 첨벙이는 소리와 함께 낙조를 띤 바다가 그를 집어삼켰다. 수면에 작은 파문이 일다가 사라졌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푸른 숲이 갈색 옷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됐고, 헐벗은 나무들은 찬바람에 떨고 있었다. 나무 아래 수북이 쌓인 낙엽이 썩는 냄새가 숲속에 진동했다. 나뭇가지에 찢긴 바람의 비명이 숨 막히는 적막을 간간이 흔들었다.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길에서 둔중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고개 너머에서 말을 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은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숨이 차는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라.”
제멋대로 거칠게 자란 수염 사이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타는 안광과 한일자로 다문 입술은 그가 심지 굳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했다. 해지고 때 묻은 옷을 입은 모습은 오랜 수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도인처럼 보였다.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말은 다시 활력을 찾은 듯 걸음걸이가 가벼워졌다. 한참 산길을 내려가자니 약초꾼처럼 보이는 노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사내는 말에서 내려 노인에게 다가갔다.
“제가 길을 잃은 듯합니다. 매초성이 어느 방향입니까?”
노인이 놀라서 물었다.
“그곳에서 곧 전투가 벌어질 모양이던데 어찌 가려 하시오? 목숨이 아깝거든 꿈도 꾸지 마시오.”
노인은 불쏘시개처럼 앙상한 팔을 흔들며 만류했다.
“전투라니요?”
“아니, 소문도 못 들었소? 벌써 몇 달 전부터 당나라 놈들이 쳐들어와 매초성을 점령하고 있다오. 조정에서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고 하오. 어마어마한 병력이 맞붙는다니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거요. 섣불리 그곳에 갔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어렵소.”
“나중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길이나 가르쳐 주십시오.”
사내는 노인의 경고를 건성으로 들었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구려. 이곳은 감악산(紺岳山)이란 곳인데, 아래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천파천이라는 하천이 나올 거요. 그 하천을 쭉 따라가다 보면 너른 벌판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전곡평야(全谷平野)요. 그곳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산이 종현산이고, 그 중턱에 매초성이 자리 잡고 있소. 아마도 지금쯤은 신라군이 그 일대에 진을 치고 있을 것이오.”
노인은 걱정스럽게 사내를 바라봤다.
“제가 방향은 옳게 잡았나 봅니다.”
순간 사내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약초꾼이지만, 허투루 나이만 먹은 것은 아니오. 내 보아하니 당신은 평범한 사람 같지 않구려. 이름이 무엇이오?”
“할 일 없이 세상을 주유하는 자의 이름은 알아서 뭐 합니까.”
“아무래도 낯이 익어서 그러오.”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사례하고 말에 올랐다.
말이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겼을 때 노인이 무릎을 치며 외쳤다.
“맞소. 그대에게서 대장군의 모습이 떠올랐소.”
신라 백성이 대장군이라 일컬으면 김유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흠칫하며 말을 멈춰 세웠다.
“대장군을 뵌 적이 있습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노인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지금은 이리 늙었지만 한때는 대장군 휘하에서 전장을 누볐던 사람이외다.”
“노인장께서는 두려움에 쫓겨 전장에서 도망쳐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찌 목숨이 있는 자가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겠소. 대장군께서 늘 말씀하시길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셨소. 이를 마음에 새기고 무서워도 이를 악물고 버틴 것이오.”
사내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비겁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받게 되더군요.”
사내의 모습을 유심을 살핀 노인은 그제야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대가 바로 원술랑이구려.”
집에서조차 내침을 당한 원술의 종적이 묘연하다는 소문이 신라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다.
“원술은 이미 죽었습니다. 난 그저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원술은 노인을 뒤로하고 산 아래로 말을 달렸다.
초성을 전초기지로 하여 한수까지 이어진 협곡 양쪽에 진을 친 신라군은 당군과의 일대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라 진영의 대장군 막사에서는 매초성의 당군을 칠 방책을 짜내기 위해 장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를 갈고 나선 대장군 춘장을 중심으로 죽지·천존 등 백전노장과 고구려 유민을 대표해서 출전한 고연무를 비롯한 장수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신라군의 규모는 5만에 육박했다. 중앙 군단인 대당(大幢)을 필두로 신라 정규군과 장창당, 백제 유민으로 구성된 백금서당, 그리고 고구려 유민 세력인 보덕국의 군대까지 합류했다.
고연무가 주위를 살피더니 계책을 내어놓았다.
“당군은 20만을 헤아리는 대군인데다가 기병이 주를 이루고 있기에 평지에서 싸우는 건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저들을 협곡으로 끌어들여 기병의 기동력을 무력화시킨 후에 싸워야 합니다.”
춘장이 말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당의 기병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소. 지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번에도 충분히 통할 것이오.”
“신라군의 주력은 보병입니다. 기병은 보병보다 파괴력이 큽니다. 이제까지는 병력의 차이가 현격하지 않아 적절한 전략으로 승부를 뒤집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당군의 수효가 너무 많습니다.”
고연무도 신라 보병의 장창과 노(弩)의 위력을 인정했지만 이는 전력 차가 크지 않을 때나 통하는 것이었다.
죽지가 나서며 승리를 장담했다.
“우리는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진법을 충분히 연마했소.”
지난날 백수성 전투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그때 펼친 육화진의 위력은 만족할 만했다는 게 신라 장수들의 판단이었다.
“제아무리 당군의 수효가 많다고 해도 그 주력인 기병만 잡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소.”
신중한 천존마저 해 볼 만한 싸움이라 여겼다.
오랜 작전 회의를 거쳐 전곡평야에서 당군과 맞붙기로 했다.
회의가 끝나고 장수들이 각자의 군영으로 돌아가자 춘장은 밀려오는 피로를 느꼈다. 장수들 앞에서는 승리를 장담했지만 20만이라는 숫자가 주는 중압감은 생각만으로도 사람을 지치게 했다.
춘장은 석문에서의 패배 이후 하루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때 죽음을 택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할 때도 있었다. 이번 싸움은 절치부심 끝에 얻은 설욕의 기회였기에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패한다면 살아 돌아가지 않을 각오였다.
이때, 경계를 서던 비장 하나가 들어와 보고했다.
“군영 주변을 배회하는 자가 있어 잡아 왔습니다. 아무래도 적의 간자인 것 같습니다.”
“어디 있느냐?”
“짐을 쌓아 둔 서쪽 막사에 묶어 두었습니다.”
춘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직접 심문할 테니 앞장서거라.”
결전을 앞둔 시점에서 적군에 대한 사소한 정보라도 놓칠 수 없었다.
비장의 안내를 받아서 간자를 잡아 두었다는 막사에 들어서니 남루한 행색에 장발을 풀어헤치고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기둥에 묶여 있었다.
“네놈이 우리 군영을 염탐하러 온 게 틀림없으렷다.”
춘장이 호통을 치자 사내가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장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장 원술 문안 드립니다.”
춘장은 원술이란 말에 놀라서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풍상을 겪으며 많이 상하기는 했지만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자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춘장은 급히 원술의 포박을 풀어 주었다.
“담릉에게서 자네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듣고 나 역시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헛수고였네. 그런데 이처럼 내 앞에 나타나다니, 이게 정녕 꿈이 아니란 말인가?”
춘장은 원술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상장군으로서 책임을 지고 처형을 당했어야 할 자신은 무사했는데 비장에 불과한 원술이 고초를 겪었으니 불공평한 일이었다.
“장군께 청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그 청은 차차 듣기로 하고, 일단 내 막사로 가세나.”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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