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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폐허가 당신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선물이 아니길 바랍니다.”
에바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부수어 놓은 신들의 잔해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머리 한 번 긁적이며 스스로 반성하게 만드는 따끔한 일침이었다. 에바에겐 우주가 무너져도 그리 큰일이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하운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감정을 애써 누르고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입을 꼭 다물고 나를 외면했다. 밤 12시를 앞두고 신데렐라는 춤을 추었고, 어떤 이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그 밤 사과나무를 심겠지만 나는 죽음의 종착역을 앞두고 청소했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지만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신의 잔해들을, 부러지고 으깨져도 우주를 품은 신들의 손과 발을, 깨지고 부서져도 미소 짓는 신들의 얼굴을 차곡차곡 주워 담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부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 부질없는 헛것이었다. 나를 믿지 못하는 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1시간 남짓 치워야 할 만큼 내가 미친 듯 깨부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 홀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신들이 여전히 멀쩡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에바와 함께 나갔던 하운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청소가 끝나고 나서야 돌아왔다. 그녀의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구급상자를 꺼내 깨지고 으스러진 내 손을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아 주었다. 병원 응급실로 가기에는 경미한 상처였고 어비수스 의료팀의 치료를 받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여긴 어딥니까?”
내가 물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매우 사무적으로 간결하게 내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정하운의 이야기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의심하면서도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어둠의 힘, 지구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 인류를 지배하려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트러스트 미 재단은 미국에 중앙본부를 갖고 있었고, 세계 각국의 수도마다 건설된 지하도시에 지국이 위치하고 있었다. 아시아 지역의 중앙본부까지 겸하고 있는 한국의 어비수스는 63빌딩 설계 당시 현재 47m 깊이의 여의나루역보다 한층 더 아래쪽에 건설된, 세계 유일의 하저 도시였다. 한강 밑에 건설된 지하도시는 원형구조로 설계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안구의 홍채와 같은 모양이라고 하운이 설명했다. 동공에 해당하는 템플 어비수스를 중심으로 알파벳의 숫자와 같이 스물여섯 개 구역이 방사선 모양으로 나뉘어 있었다. 섭리의 눈이라 불리는 전시안(全視眼·all-seeing eye)에 대적, 그 의미를 해체하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추측했다. 지상 출입구는 63빌딩 지하 3층, 서문 출구 쪽에 있었고 일반 주차장과 따로 구분된 그룹 경영진의 전용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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