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대한민국 역사를 ‘민력(民力)’이 신장된 시기라는 관점에서 조망할 경우 가장 중시해야 할 측면은 교육일 것이다. 전통시대 내내 한국에서는 봉건적 신분제 때문에 일반 서민에게는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일제의 강점으로 근대적 교육 운동은 중단되었고 우민 정책을 시행한 일제 35년 동안 한국의 민중 교육은 후퇴했다.
일제 통치하에서도 국내의 주요 사립학교와 국외의 민족학교에서는 민족정신을 배양하는 교육이 지속되었지만 그 영향은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광복 무렵 한국 민중의 지적·기술적·도덕적 수준은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어떤 형태로든 정식교육을 받은 한국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했으며, 그중에서 전문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수는 1% 미만이었다. 해방 당시 12세 이상 국민 중 78%는 문맹이었다.
광복 이후 한국인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 국민이 교육받을 기회를 얻었고,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과 경제적 자립에 필요한 훈련을 받게 되었다. 교육 기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계속 확대되었다. 이렇게 교육 재건이 조성될 즈음 6·25전쟁이 발발해 대다수 학교 시설이 파괴되고 교원 확보도 어려웠다. 그러나 6·25전쟁은 한국민의 교육열을 오히려 자극시켜 전시 중에도 교육의 맥은 끊이지 않고 더욱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1950년대 한국에서는 문맹이 퇴치되었다. 또한 6년간의 의무교육이 실시되었으며 중·고등학교 및 대학이 많이 설립되었다. 1950년대에 나타난 이러한 교육 성장의 양상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육 기적이었다.
195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교육 기적을 살펴보면 1945년 광복 당시와 1960년을 비교해 볼 때 초등학교 수는 2834개에서 4620개로 62.3% 증가했고, 학생 수는 136만6024명에서 350만9627명으로 2.6배 증가했다. 중학교의 경우, 학교 수는 97개에서 1053개로 무려 11배 가까이 증가했고, 학생 수는 5만343명에서 52만8614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고등학교의 경우 224개에서 640개로 3배 증가했고, 학생 수는 8만4363명에서 26만3563명으로 3.1배 증가했다. 대학교의 경우 학교 수는 19개에서 63개로 3.3배, 학생 수는 7819명에서 9만7819명으로 12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이 시기에 한국인의 고등 교육열이 급격히 고조되어 1947년에 이미 20개의 신설대학이 문교부의 인가를 받았으며 6·25전쟁이 끝나면서 1952∼54년에는 이른바 대학 붐이 일어났다. 그 당시 문교 당국은 지방 종합대학교 창설·교원 자격 인정 기준 제정·대학 설치 기준령 공포 등의 대책을 세워 성과를 올렸다.
한국인의 고등 교육열은 1950년대 유학 붐을 불러일으켰는데, 1953∼78년 문교부의 해외 유학 인정자 현황을 보면 총 1만4503명이 50여 개 나라에 유학했으며, 그중 1만2418명이 미국·544명이 서독·295명이 프랑스·244명이 캐나다·227명이 중국·185명이 일본에 유학했다.
1950년대 한국 교육은 양적인 면에서의 발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교육제도 및 교육 내용 등 질적인 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50년대 한국 교육의 지침은 헌법 및 교육법에 명시되어 있었는데, 그 주요 특징은 의무교육제·6-3-3-4 기본 학제·교육 자치제 등으로 요약된다.
1950년대 한국 교육계는 교육을 통해 국민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교육 기회가 급격히 확대되어 민주주의에 헌신적이고 행동 지향적인 학생 집단이 조속히 형성되어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다. 1950년대 교육이 지향했던 이념은 탈(脫)일본화·민주화·민족화로 이와 같은 교육 이념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된 요소는 개인의 잠재적 능력 개발을 중시하는 민주화·한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과학기술의 연마를 강조하는 과학 교육이었다.
적어도 자료를 통해서 본다면 1950년대는 교육 혁명이 싹튼 시기였다. 1952년부터 실질적인 의무교육이 실시된 결과 광복 당시 13세 이상 80%가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1959년에는 순 문맹률이 22.1%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고등교육 이수자도 크게 증가함으로써 1950년대 이후 노동집약적 산업화의 밑바탕이 되는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의 풀(pool)이 형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는 1960년대 이후에 꽃피는 역동성의 싹을 회임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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