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4] 그 남자, 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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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27 06:30:43

승연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척 살며시 나가려고 입구 쪽 자리로 옮겨 앉았다. 은영과 눈이 마주쳐 나가자고 눈짓했다. 은영은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그녀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잔을 들었다. 아무래도 일어설 기미가 안 보였다. 승연은 가방을 집어 들고 까치발로 바닥을 딛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제법 바람이 찼다. 누군가 뒤에서 승연을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김태주였다. 승연이 무슨? 하는 표정으로 보자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막걸리 석 잔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막걸리로 생긴 두통이 찬바람에 날아가길 바랐다. 승연은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내내 버스 시간표만 체크하고 있던 자신이 한심했다. 이 시간이면 오산이 아닌 신촌이나 홍대 앞·종로 거리 어디선가에서 시간 보낼 줄 알았지.

재킷을 여미며 걷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담배 피우고 나서 식당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김태주였다. 불 꺼진 버스는 대기 중이었고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김태주는 승연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은 없었다. 너무 일찍 나왔나.

“담배 더 있어요?” 승연의 뜬금없는 질문에 태주가 멈칫하며 물었다. “담배 피울 줄 알아요?”

“아뇨, 지금 배우면 되지요.”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태주가 승연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숨을 크게 들이쉬듯 담배 연기를 목구멍으로 넘기면 돼요. 아주 쉬워요”

태주 말대로 승연이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켰다.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면서 따끔거렸다. 승연이 인상 쓰며 기침하자 태주가 말했다. “소주 처음 마실 때 목 따가운 거랑 같아요. 두 번째부터는 진짜 쉬워요.” 태주가 시범을 보였다. 연기를 가슴까지 빨아들이라는 듯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가늘고 긴 담배 연기가 찬바람에 흩어지면서 넓게 퍼졌다. 한 번 더 깊이 들이마시려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몹쓸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승연은 얼른 담배를 땅바닥에 던져 발로 비볐다. 기사 아저씨였다. 승연이 차에 올라타려는데 태주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경제과 84 김태줍니다.” 승연은 버스 앞문에 한 발을 올린 채 잠시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어쩌라고, 나도 학번이랑 이름이랑 뭐 그런 거 말하라고?’ 승연은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대로 버스에 오르는 승연의 뒤에서 김태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갈 때가 올 거예요. 그때 도망가면 돼요. 지금은 아닐 겁니다.”

마치 독백처럼 들리는 묘한 뉘앙스였다. 승연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원래 맨 뒤에 앉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에게 통로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충분히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을 때 승연은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김태주의 뒷모습이 막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 사람, 걸을 때 운동화를 살짝 끄는 습관이 있구나, 마치 가기 싫은 곳을 억지로 가는 사람처럼. 술에 취한 남학생 여럿이 우르르 버스에 올라탔다. 승연은 버스 창문을 열었다. 매운 담배 연기가 목구멍에 남아 간질거렸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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