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2] 그 여자 윤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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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24 06:30:13

승연의 순서가 되었다. 손목시계를 봤다. 분침이 가리키는 숫자를 확인하곤 1분 안에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67년 양띠입니다, 유일하게 잘하고 좋아하는 외국어가 영어뿐이라서 영문과에 지원했고요. 태어난 곳은, 서울입니다, 제 아버지는 일제 시절 양복점을 한 할아버지의 재단 기술을 이어받아 명동에서 양복점을 하시다 지금은 남성 패션복 회사를 운영하십니다.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고 지금까지 한 일 중에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지 않아 집 근처에 있는 학교 다섯 군데 중 한 군데도 못 간 점이에요.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을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한 달 됐어요.”

남자친구가 없다니까 동기 남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하지 마. 난 여기서 남자친구 사귈 마음이 하나도 없거든.’ 승연은 손목시계를 흘끗 봤다. 다행히 1분을 넘기지 않았다. 승연은 잠시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일어날 계획이었다. 누군가가 승연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꿈이 있었던가. 승연은 ‘오산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말하려다 말았다. 은영과 눈이 마주쳤다. 은영이 윙크로 만족스러웠다는 신호를 보냈다.

한 명씩 자기소개가 끝나자 2학년 과 대표가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마이크처럼 들었다. 그는 우리들의 목표는 살아 있는 동지들의 뜨거운 피로 쓰러져 가는 민주를 소생시키는 것, 군부독재가 종식되는 것이며 죽어 가는 민주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중간중간 박혀 있던 ‘동지’들이 오른손을 불끈 쥐고 ‘군부독재 타도하자’를 삼창했다. 갑자기 파티장이 전쟁 준비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2학년 과 대표가 선창했다.

“이제부터 우리들의 저항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우리 민주 투사들은 목숨이 살아 있는 한 군부독재 종식을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를 각오가 돼 있다, 민주 투사들이여 결집하라!”

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승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갓 들어온 새내기들조차 그의 선창에 ‘군부독재 타도하자’를 따라 외치고 있었다. 군중심리는 별 게 아니었다. 남이 웃으면 따라 웃고 남이 울면 따라 우는 심리 작용이었다.

어수선한 사이 식당 문이 열렸다. 지난번 과사무실에서 봤던 금테 안경을 쓴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를 본 1·2학년 후배들이 일어나려 하자 그녀는 손으로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조용히 식탁 끝자리에 앉았다. 은영이 승연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3학년 윤희숙 선배인데 이화여대에서 운동하다 자퇴하고 이쪽으로 편입했대. 여기 한신 운동권 여학생들 학습 담당.”

술잔이 오가는 사이 은영은 운동권 의식화 작동에 대해 승연에게 귀띔했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일단 시각 교정을 한대.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가짜 지식을 다 날려 버리는 거지. ‘전환 시대의 논리’ ‘해방 전후사의 인식’ ‘우상과 이성’ 같은 책들을 읽는 거야. 그다음에는 기초 철학과 경제사 공부를 하고 나중에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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