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81] 노조 설립 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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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09 06:30:00

일월산업에서 노조가 만들어진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공장처럼 노조 만든다고 조합원들을 해고하거나 이를 방관한 임원들을 쪼아대거나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불안할 정도였다.

노조 만든다는 소문이 돌 때만 해도 대머리 양 부장과 ‘반백’ 이 상무는 직원들에게 노조의 노자도 꺼내지 말라, 노조 만들다 걸리면 관련자들 모두 해고하겠다 흘리고 다녔지만 막상 권지호는 노조위원장을 만나 법과 원칙만 지키면 노사가 행복한 직장으로 키워 나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괜히 노조 만든다고, 노조에 가입한다고 행여 불이익이라도 당할 줄 알았던 근로자들은 노조 설립 필증이 나온 날 환호했고 숙소에선 자축 파티가 벌어졌다.

동이가 가장 기뻐했다. “내가 진즉에 전태일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자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드만 우리 일인디 우리가 안 싸우면 누가 대신 싸워 준당가.” 희숙은 동이가 노조 설립에 적극적이었던 것처럼 으스대고 다니는 모습에 흐뭇했다.

영미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의 삐딱했던 태도와 달리 노조 모양새가 드러날 무렵부터 별 도움 되지 않는, 이미 알고 있는 자잘한 정보를 중요한 내용인 양 흘리고 다니며 노조 부역에 한쪽 발을 담갔다. 그러다 노조가 힘 써 보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에 대비해 적당히 거리 두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노조 설립에 필요한 안건을 두고 찬반 투표를 하면 영미는 항상 중립이었다. 중립이란 게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쪽 논리에 균형을 잡느라 유지한 태도가 아니라 이도 저도 아닌 관망이었다. 그건 어느 쪽이 우세하거나 열세가 되든지 유리한 쪽으로 편을 들겠다는 치사한 선택이었다.

확신이 없는 영미의 현실적인 중립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영미는 노조 설립 설명회 시간마다 기웃거리며 한쪽 발을 담갔다. 어느 쪽의 힘이 더 세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천 산단 공장 이곳저곳에서 노조가 설립되고 있다는 소식이 매일 들려왔다.

뉴스엔 연일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군부 독재 철폐하라고 시위하고 공장 주변에선 노동자들이 노동의 권익을 주장했다. 정부는 시위자들을 폭도 취급하며 공권력으로 막아 냈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희숙은 노조 설립 설명회에서 낮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여공들을 설득했다. 민주 세상을 열기 위한 노동자들의 땀은 피가 될 것이고 피는 민주 사회의 마중물이 되어 모두 공평한 세상을 누리게 될 거라고. 땀·피와 같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섬뜩하면서도 가슴에서 무엇인가 솟구쳐 오르는 걸 느꼈다. 동이는 희숙을 거들었다.

“암만, 피의 대가 없이 좋은 세상이 열린당가.”

동이의 추임새에 그 자리에 모인 여공들이 박수했다. 영미는 팔짱 끼고 지켜보면서도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명단에는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두곤 했다. 참석자 명단은 희숙이 혼자만 관리했다. 영미는 대머리 양 부장에게 이런 내용을 알리지는 않았다. 양 부장이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지만 양 부장의 끄나풀이 되는 건 끔찍했다. 권지호 부탁이라면 모를까.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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