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83] 망월동,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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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11 06:20:55

태주는 큰 가방을 들고 있는 승연을 보자 눈이 둥그레졌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차림이 아니었다. 승연은 작정하고 나온 모습을 들킨 것 같아 태주의 눈길을 따라가며 변명했다.

“아, 이거요. 혹시… 만에 하나, 기차 시각을 못 맞춰 기차 놓치게 될까 봐.”

1박 할 생각으로 짐을 꾸린 모습을 태주가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이 쓰였다. 태주는 아무 말 없이 승연의 손을 잡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태주가 승연을 창가 쪽에 앉히려는데 승연이 태주를 창가 쪽으로 권했다. 가방에서 승호 외투를 꺼내 갈아입으라 했다.

버버리 로고가 새겨진 감색 더플코트였다. 태주는 선뜻 받지 못하고 승연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승연은 생각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입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주가 승호 옷으로 갈아입으니 누가 봐도 부유한 승연의 남자친구였다.

승연은 아닌 게 아니라 자기 돈으로 태주에게 좋은 코트를 사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미안했다. 태주에게 물질적인 행위를 한다는 게 상처를 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가난과 절망이란 진흙탕 속에서 자신이 존재할 수 있도록 지탱해 준 유일한 에너지가 있다면 그건 자존심일 게 분명했다.

승연은 그의 자존심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했다. 내 생각이 맞았네! 부잣집 남자친구로 변장했군요. 이제부터 서울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제 남자친구 역할 잘하셔야 해요. 태주는 그런 뜻이었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차가 움직일 무렵 태주가 물었다. “부모님께 뭐라 하고 왔어? 만약, 오늘 진짜 못 올라가면 어쩌려고”

승연은 예상한 듯 태주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동기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누구 이름을 댈까 했는데 안 물으시고 부의금 내라고 봉투 주시더라고요. 이걸로 오늘 비용 다 쓰면 돼요. 남으면 선배가 가져가세요.” 태주는 승연이 내민 봉투를 밀어냈다. “넣어 둬. 필요하면 그때 쓰지 뭐.”

객실 승무원이 지나갈 때는 승연이 태주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대며 잠든 시늉을 했다. 간간이 눈을 뜨기도 했지만 둘은 내릴 때까지 머리를 마주하고 단잠에 빠졌다.

태주와 승연은 광주역에 내려 점심 할 곳을 찾았다. 승연이 태주에게 광주에 온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선배 만나러. 승연은 멈칫했다. 태주가 데려간 곳은 생선구이·된장 애호박 찌개가 유명한 집이었다.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더니 과연 반찬이며 찌개며 입에 잘 맞았다.

식당에서 나올 때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왔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비가 오면 어쩌나. 식당을 나와 큰길로 들어섰는데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식당 주인이 태주에게 총각! 을 외치며 낡은 우산 하나를 건넸다. 혹시 비 올지 모릉께 요거 하나 가져 가쇼 잉. 안 줘도 된께. 식당 주인은 줄행랑치듯 식당 쪽으로 뛰어갔다. 겨우 택시를 잡아 망월동으로 가자 했더니 기사가 태주와 승연을 흘끗 쳐다봤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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