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82] 연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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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10 06:20:30

태주가 승연한테 연락하지 않는 한 도망 다니는 태주와 연락할 길은 없었다. 승연은 태주 소식이 궁금해 전화벨만 울리면 혹시 그인가 싶어 냉큼 수화기를 들곤 했다. 오빠 승호가 후배를 또 소개하겠다고 했을 때 마음에 어떤 동요도 일지 않은 건 태주 때문이었다. 수배당한 상태로 친구 결혼식에 가고 군대 친구 면회도 갔다며 승연을 안심시켰다. 승연은 여전히 그가 밥은 먹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어느 만화방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물어보지 않은 걸 후회했다.

승연은 갑자기 서울대 연건 캠퍼스 소아과 병동 화장실이 떠올랐다. 낮에 어디든지 다녀도 잠은 한곳에서 잘 것 같았다. 추운 겨울엔 따뜻한 곳이 필요할 테니 저녁 무렵 그곳에 가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 태주한테 따뜻한 외투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빠 승호 방에 들어갔다.

태주와 승호는 키가 비슷했다. 오빠 체구가 더 큰 것 같은데 외투는 커도 되겠다 싶었다. 옷장에서 옷을 고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태주였다. 승연은 태주 목소리를 듣자마자 왜, 이제 전화하세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소리 지를 뻔했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 쏟아낼 뻔했던, 왜 이제 전화했냐는, 기다렸다는 말은 그에 대한 그리움이었단 걸 승연은 알고 있었다.

승연은 집안에 전화 내용을 듣는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 계세요. 제가 지금 갈게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태주는 다른 건 필요 없고 내일 아침 일찍 같이 갈 곳이 있는데 먼 곳이라 하루 자고 올 수도 있다, 가능하겠냐 물었다. 그가 승연과 어딜 갈 생각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먼 곳이라 하루 자고 올 수 있다는 말이 걸렸다. 한 번도 외박해 본 적이 없고 아버지 허락을 받아 낼 방법이 없어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흐르자 태주가 아, 곤란한 제안을 한 것 같군. 미안. 그러면 아침 첫차 타고 저녁 늦게 오는 건 어때? 그건 가능할까? 태주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반드시 승연과 함께 갈 곳이 있다는 의미였다. 지난번처럼 열악한 노동 현장을 보여주려는 걸까. 단지 그곳이 아주 먼 곳이라서 그런 걸까. 태주가 대답을 기다릴 정도로 승연이 망설이면 분명히 태주는 없던 걸로 하자며 전화를 끊을 게 분명했다. 승연은 침착하게 말했다. “내일 어디서 몇 시에 만날지 말해 주세요.”

서울역에서 만난 태주는 광주행 무궁화호 티켓 두 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광주는 왜…. 망월동에 선배 만나러 가는데 너랑 같이 가고 싶어서. 망월동이라니, 승연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정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까닭이 있겠지, 생각했다. 승연은 기차표 마련하느라 또 일용직 일자리를 찾았거나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을 태주가 안쓰러웠다.

기차표·밥값·숙식비는 승연의 용돈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승연이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제법 모아 통장이 두둑했다. 기회를 봐서, 태주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자기 돈을 가져다 써도 된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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