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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제국의 꽃’ [236] 무관학교
민족장교의 양성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2-15 06:30:10
 
 
아관 망명 이후 군사력 양성이 시급했던 고종은 18964월에 기존 무관학교에 입학생을 받고, 4월에는 이병무를 무관학교 교두로 임명했다. 그러나 520일에 교육을 중단하고, 이병무 대대장에게는 친위대 제4·5대대 교련을 맡긴다. 이 무관학교는 1896111일에 왜당 정부에 의해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후 경운궁 환어 후 시위대와 친위대의 병력 수가 급팽창되면서 친일세력의 영향에서 벗어난 새로운 대형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장교를 양성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마침내 189711월에 군부협판 주석면이 무관학교를 특설해 총기 있고 준수한 젊은이로서 시세에도 밝고 경서와 역사에도 익숙한 사람을 뽑아 사관의 벼슬을 주어 교육하고 연습시켜 문무를 겸비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주청하여 의정부의 회의를 거쳐 황제의 재가를 얻었다. 189871일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가 옛 훈련도감 자리에 세워졌다. 이 무관학교는 생도 200명 규모의 대형 무관학교였다. 이 학교는 학도에 대한 신원보증 조건을 강화했는데, 이는 을미왜변 당시 왕후 시해에 가담한 훈련대와 친위대 장교들의 반역 행위를 기억한 때문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한국 정부를 장악한 일제는 무관학교를 일본식으로 개편했고, 정미7조약 및 군대 해산(8) 후에는 모집 인원을 15인으로 축소했다가 19097월에 학교를 폐교시켰다. 따라서 무관학교가 민족 간성(干城양성이라는 본래의 취지로 운영된 기간은 19049월까지다.
 
새 무관학교 관제에 의해 무관학교에서 교련을 마치고 임관된 장교의 수는 1904년까지 도합 476명에 달했다. 그 전에 임관된 무관학교 출신 무관 19인을 합치면 무관학교 출신 무관은 총 495명에 달했다. 이것은 12개 연대를 편성·지휘할 수 있는 규모였다. 18987월 첫 무관학도 200명 모집공고에는 1700명이 응시하여 8.5:1의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무관의 품계와 급료가 문관에 비해 현격히 높았기 때문에 양반 자제들이 너도나도 무관을 지망했다. 해외 유학 경력자 중에서도 다시 무관학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한제국 관원 중에 유학생은 모두 93명이었는데 이들 중 29명이 다시 군부로 진출했다.
 
신분적으로는 처음엔 양반 출신이 많았지만 정부 고관들과 근왕 세력이 평민 출신으로 교체되면서 이들의 추천을 받는 무관학도들도 거의 평민과 보부상 등 일반인으로 교체되었다. 당시 무관학교 입학자는 두 부류였다.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이룩하고자 하는 소수의 뜻있는 청년들과 입신의 길로 무관학교를 택한 귀족 자제들이었다. 다수를 차지한 출세 지향자들은 자연스레 친일파가 되었고, 애국적 민족 장교들은 1907년 전후 일제의 강압적 군대 감축 과정에서 조기에 해고되었다. 또한 그들은 정미년 8월에 해산된 한국군 장병들을 이끌고 의병장과 의병부대 지휘관이 되어 정미년 국민 전쟁을 지휘하고, 1910년 이후에는 민족의 간성이 되어 독립군과 광복군의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특히 1920년대 독립전쟁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대표적 인물인 지청천은 1907년 입학생이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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