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환의 시사저격] 할 말 못하는 공직 풍토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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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선 일이 커질 줄 몰랐을까
눈치만 보다가는 큰일 수습 못해
대처 수상과 맞장 뜬 英 재무장관

구월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01 06:31:20

필자가 영국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은 공직자들의 당당함이었다. 구질구질하지 않고 할 일을 당당하게 함으로써 본인의 명예와 소신을 지키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사실 영국에는 우리말의 ‘눈치’에 꼭 맞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웃사람 눈치 보느라 눈알이 피곤한 우리와는 사회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공적인 관계에서 당당하게 처신함으로써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는 것은 국민이 보기에도 멋있는 일이다.

영국의 1980년대를 통치했던 마가렛 대처 총리와 나이젤 로손(Nigel Lawson) 재무장관 사이의 싸움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필자가 연합통신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그 시절, 대처 총리는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남매처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포클랜드 전쟁까지 성공리에 수행하는 등 그 위세가 대단했다. 워낙 소신이 강한 정치인이라 정권에 도전하던 노조 세력의 버릇을 고쳐 놓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대처 총리에게 재무장관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영국의 재무장관은 내각 서열 2위로 공관도 총리 관저 근처인 다우닝가 11번지에 있다. 당시 로손 재무장관은 5년간이나 장관직에 있었는데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 대처의 경제특보로 임명되어 걸림돌이 되자 대처에게 그를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대처가 반응이 없자 그는 시일을 정해 늦어도 그때까지는 그를 해임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가 정한 날까지 소식이 없자 바로 그 다음 날 장관직 사임을 발표하고 공관을 떠났다. 하지만 5년간이나 재무장관을 시켜 줬는데 배신했다는 등 우리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류의 기사는 없었다. 총리는 제 할 일을 했고 장관도 제 할 일을 했다는 식으로 비교적 쿨하게 보도했다. 로손 장관도 더 이상 뒷말을 하거나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우리 정치에서는 이런 당당함을 보기 어렵다. 특히 측근이라는 사람들이 눈치 보기에 바빠서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일을 크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또 집권자가 아차 하는 순간에 판단 착오나 측근들의 오도로, 또는 측근들이 할 말을 못해서 큰일을 당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와 학생·시민 대표들을 접견할 때까지 부정선거의 진상을 몰랐다고 한다. 집무실 근처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쏜 총소리를 듣고서야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을 때는 이미 수습할 시점이 지난 뒤였다.

장면 정권도 쿠데타 정보를 입수했으나 설마 하다가 당했다. 같은 장(張)씨(장도영)가 참모총장인데 ‘설마’ 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김영삼 제명’을 밀어붙인 차지철 경호실장의 오판에 당했다. 부마사태도 ‘그까짓’ 하며 과소평가하다가 결국 궁정동의 총소리로 이어졌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박정희가 경호실장에게 무소불위의 실권을 허용한 것도 큰 오판이었다. 주변에서 큰일 날 거라고 수근거렸지만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군권을 쥐고 있었던 정승화 비상계엄사령관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해직하려고 했으나 극비의 인사 계획이 새어 나가는 바람에 12.12 되치기를 당했다. 그때는 3김(金)도 군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전두환의 선의만 믿으려고 한 것이다. 필자는 당시 김영삼 총재의 신민당 출입기자였다.

박근혜의 대통령 시절에는 가장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의 분신처럼 움직여야 할 어느 비서실장은 재직 기간에 단 한 번도 박근혜를 독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열 일 제쳐 놓고 자주 만나야 할 비서실장을 만나지 않았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대통령이 구중궁궐 외딴 섬에 스스로 갇혀 있는 사이에, 최순실에 관한 소문이 시중에 흘러 다니며 민심을 자극했고 광화문은 성난 인파로 넘쳐 났다.

민심이 돌아서자 하루 전에만 해도 깍듯이 모시던 여당 의원들도 탄핵 대열에 가담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박근혜 대통령 자신은 헌재에서 탄핵 소송이 기각될 줄 알았다고 한다. 세상에! 세상 돌아가는 걸 그렇게 모르고 있었으니! 자랑 같지만 필자는 헌재 결정이 나기 훨씬 전에 탄핵이 전원일치로 인용될 것이라는 글을 쓴 일이 있다. 필자처럼 퇴직 후 혼자 지내는 사람도 예견한 것을 왜 청와대의 그 많은 참모와 휘하의 장관들은 말을 못 했을까.

이런 권력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걸 느끼게 한다. 김건희 여사의 주변에서는 평양에 들락거리는 최재영의 정체를 몰랐을까. 명품 백 받고 가만히 있으면 일이 커질 줄 몰랐을까. 주변의 측근들은 무슨 말들을 했을까. 왜 당당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정권 흥망이 걸린 선거판에서 잘 싸우고 있는 장수(한동훈)를 자르려고 한 걸까…. 의문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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