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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지휘부에서는 연개소문의 주재 아래 대책 회의가 열렸다.
군사 도수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간교한 책략에 넘어가는 바람에 당군이 요하를 건너는 것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큰 타격입니다.”
모든 장군이 침울해하고 있는데 연개소문이 호탕하게 웃었다.
“당군에도 지략이 남다른 자가 있긴 하구려. 그렇다 해도 그리 걱정할 바는 아니오.”
도수금이 영문을 몰라 묻는다.
“요하 방어선이 저리 쉽게 뚫렸는데 대막리지께서는 어찌 걱정할 게 없다 하십니까?”
연개소문은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벌써 4월이오. 2월에 출병한 당군의 선봉대가 이제 겨우 요하를 건넜소. 신성은 견고한 성이기에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당군이 또 얼마의 시간을 허비해야 할지 모르오. 요행히 신성을 함락시킨다 해도 우리의 도성까지 오는 길에는 무수히 많은 성이 버티고 있소. 저들이 과연 그 성들을 단시간에 함락시킬 수 있겠소?”
연개소문이 여유만만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당군의 보급선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 말뜻을 이해한 도수금이 맞장구를 쳤다.
“대막리지 말씀을 맞습니다. 당군은 걸어 들어와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그렇소. 당주가 제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라 해도 수백 년을 갈고 닦아 온 우리의 방어 체제를 극복하기는 어렵소. 결국 당군은 요동을 헤매며 기운을 빼다가 보급이 끊기면 퇴각할 거요.”
도수금은 연개소문이 당 태종보다 한 수 위라 생각했다.
화제는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해군으로 옮겨갔다.
“평양도행군 대총관 장량이 내주(萊州)를 출발한다고 하오. 저들이 지난번처럼 패수구로 진입해 평양을 바로 치지 않겠소?”
연개소문의 물음에 해군을 책임지고 있는 온사문이 대답한다.
“수나라 시절 평양을 쳤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바로 평양으로 치고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평양도행군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비사성을 공격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대막리지는 온사문에게 다시 물었다.
“비사성의 방위 태세는 어떻소?”
“매우 훌륭합니다. 절대 나가서 싸우지 말고 수성에만 전념하라고 성주에게 단단히 일러 두었습니다. 비사성주 걸사비(乞絲飛)는 돌다리도 두드린 다음 건널 사람이니 걱정하실 게 없습니다.”
온사문은 온달 장군의 손자로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대막리지의 신임이 두터웠다.
연개소문이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비사성은 천험(天險)의 요새니 누구도 쉽게 함락시키지는 못할 거요.”
도수금이 끼어들었다.
“장량의 군대가 워낙 수효가 많아서 비사성의 군사만으로 막아 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패수와 압록수 하구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을 비사성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온사문이 손사래를 쳤다.
“해군을 모두 비사성으로 집결시키면 서해안 일대의 해상 방위에 구멍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저들이 방향을 바꿔 곧장 평양으로 진격할 수도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심사숙고한 후 결론을 내렸다.
“온 장군의 말씀이 맞소. 다른 지역의 방위도 중요하오. 비사성은 견고한 요새이고 성주가 노련하니 문제가 없을 것이오. 우리는 앞으로 요동에 전력을 집중합시다.”
장수들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한편 요하를 건넌 이세적의 군대가 현도 땅에 이르자 주변의 고구려 성들은 모두 성문을 닫아걸고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이세적은 부대총관 도종을 시켜 신성을 공격했다. 신성은 3세기 말에 축조된 성으로 고국원왕 대에 증축됐다. 나지막한 높이의 야산 3개를 한데 묶은 환성(環城)인데, 남쪽으로 흐르는 혼하(渾河)의 지류가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성 외곽의 총 길이는 10리가 넘었고, 남쪽 성벽은 특히 높고 가팔라서 철옹성이라 불릴 만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북변의 요충지이자 초원으로 가는 관문으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여러 차례 후연과 돌궐 등의 침입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험준한 지형과 용감무쌍한 군사들 덕분에 가볍게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당나라 도종은 절충도위 조삼량(曹三良)을 선봉으로 내세웠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많은 군사를 잃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신성에서의 공방전은 그 후로도 열흘이나 계속됐다. 하지만 성은 함락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에 지친 이세적은 부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숙의했다.
이세적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십여 일이나 공세를 펼쳤는데 끄떡도 하지 않았소. 과연 천혜의 험지에 세워진 성답게 쉽지 않구려.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소?”
도종이 난색을 보인다.
“고구려 군사들을 성 밖으로 끌어내지 않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꼼짝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행군 총관 강확(姜確)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제안했다.
“신성은 방어에 특화된 곳입니다. 차라리 이 성을 포기하고 다른 성을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세적이 쌍심지를 돋우며 소리쳤다.
“당나라 최고 정예병이라 자부하는 우리 군대가 이깟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해 피해 간다면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야 폐하 앞에서 면목이 서겠느냐!”
상황 판단이 빠른 도종이 나섰다.
“하지만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폐하의 본진과 합류하기 전에 실적이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일단은 개모성부터 점령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장수들도 앞다투어 동의하자 이세적도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모든 장수가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구려. 신성은 뒤로 미루고 남으로 내려가 개모성부터 함락시킵시다.”
다음 날 요동도행군은 일제히 영채를 거두고 남으로 진군하여 개모성에 다다랐다.
개모성은 성 둘레가 4리밖에 되지 않는 매우 작은 성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성이라도 공략이 쉽지는 않았다. 당군은 며칠 동안 무서운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만큼 고구려군의 방비가 철저했다.
개모성도 무너뜨리지 못하자 강확이 이세적에게 머뭇대며 말했다.
“굳이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요동성으로 바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세적은 장수들이 한심스러웠다. 요하를 건넌 이후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그나마 조그만 개모성마저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생각하니 서글펐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세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신성은 그렇다 치고 이 작은 개모성 하나 무너뜨리지 못한단 말이냐! 닷새의 여유를 주겠다. 그래도 함락시키지 못하면 너희의 목부터 베겠다.”
예상치 못했던 격한 반응에 강확뿐 아니라 다른 장수들까지 정신이 바짝 들었다.
강확은 무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와 군사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대총관께서 닷새의 여유를 주셨다. 그 시간 안에 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너희들 목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강확은 칼을 비껴들고 개모성 앞으로 달려갔다. 이를 본 당나라 군사들도 죽기를 각오하고 성벽을 향해 뛰어나갔다.
성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개모성주는 활을 잘 쏘는 수하 군사를 불렀다.
“저기 붉은 갑주를 입고 있는 자가 행군총관 강확일 것이다. 저자를 쏘아 쓰러뜨려라.”
궁수는 활을 들었다. 그의 눈에 목표물이 들어왔다. 그는 목을 조준하고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목에 꽂혔다. 강확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총관이 쓰러지자 당군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이세적이 뛰쳐나오며 외쳤다.
“총관은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그의 희생을 헛되이 해서야 되겠는가! 모두 목숨을 아끼지 말고 공격하라!”
강확의 죽음에 자극을 받은 당나라 군사들은 분연히 성으로 달려들었다. 개모성의 군사들은 노도처럼 몰려오는 당군을 온 힘을 다해 막아 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공방전이 펼쳐졌다.
이윽고 당군의 포차가 도착하자 전세가 역전됐다. 수의 포차를 개량한 포차는 3백 근이나 되는 바위를 4백 보 떨어진 지점까지 날릴 수 있는 위력이 있었다. 5대의 포차가 성벽을 향해 커다란 바위를 날렸다. 포석을 맞은 성벽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에 놀란 고구려 군사들은 재빨리 목책을 써서 보수했지만 당군의 파상 공세를 막기는 어려웠다. 개모성은 결국 닷새 만에 함락되었다.
평양도행군 총관 장량은 3월 중순에 전함 5백 척을 이끌고 산동의 내주를 출발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고구려의 비사성에서는 작전 회의가 열렸다.
비사성주 걸사비가 수하들에게 의논조로 물었다.
“장량이 함선 500척을 이끌고 내주를 떠났다고 하니 곧 여기 비사성에 닿을 것이다. 어찌 대응해야겠는가?”
부장 돈황(敦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비사성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굳이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나가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준비를 충분히 하고 농성(籠城)하면 저들은 제풀에 지쳐 물러갈 겁니다.”
아장 걸회수(乞會秀)가 못마땅해서 부르짖는다.
“저깟 당군을 겁내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습니까. 저에게 전함 100척만 내주시면 저것들을 모조리 수장시키겠습니다.”
그는 성주 걸사비의 아들로 힘이 세고 담력이 남달랐지만 흥분을 잘했다.
걸사비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드디어 단안을 내렸다.
“돈황의 말이 옳다. 지난번 온사문 장군이 오셨을 때 당군이 쳐들어오면 성을 굳게 지키기만 하라고 수없이 당부하셨다. 그러니 수성전을 펼치기로 한다.”
“저것들이 비사성을 포기하고 장산 군도(長山群島)를 거쳐 패수구로 갈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평양성이 위태로워집니다.”
걸회수의 이의제기에도 성주는 머리를 흔들면서 단호히 말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라. 그에 대비하여 장산 군도의 해양도·대장군도·석성도 등에 전함을 대기시켜 놓았다. 만일 저들이 패수구 쪽으로 기수를 돌린다면 막강한 우리 해군에 의해 궤멸될 것이다.”
걸회수는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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